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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이 Apr 06. 2022

그럼에도 행복하기를

<해피투게더 리마스터링> 리뷰





<해피투게더 리마스터링>

(Happy Together, 1997)

홍콩/97분/드라마

감독 : 왕가위

출연 : 양조위, 장국영, 장첸 외







아휘


아휘는 책임감이 강하며, 매사에 올곧은 자세로 임한다. 살아가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꾸역꾸역 살아남고자 한다. 그런 아휘에게 보영은 예상 밖의 상황이다. 느긋하며 책임감이 있기는커녕 아픈 아휘에게 밥을 해달라고 철없게 조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보영의 존재는 아휘에게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휘는 보영을 대할 때도 책임감 있게, 올곧은 자세로 그를 대한다. 그러나 보영은 아니다. 이과수 폭포로 향하던 중 대뜸 지겨워졌다며 길을 떠나는 보영은 아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처와 황당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휘는 보영이 끔찍하게 싫다. 그러나 동시에 아휘는 보영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나는 너와 다르다며 보영의 ‘지조 없음’을 비난하며 본인을 보호하려는 아휘는, 결국 본인이 자초한 끝없는 불안에 보영을 억압하기 시작한다. 양손이 다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영을 욕하고 저주하면서도 보영이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준다. 동시에 아휘는 보영에게 집착한다. 꺼지라고 소리치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보영을 자신의 침대에 재운 날, 덤덤하게 보영의 여권을 챙기는 아휘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무섭기도 하다.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보영의 외출마저 막으려 하자, 결국 보영은 아휘를 떠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보영이 떠난 후, 아휘는 점차 보영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결국 자신에게 '다시 시작하자' 말하던 보영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반복한다. 아버지에게 '다시 시작하겠다' 말하는 아휘는, 보영을 통해 한 뼘 성장한 아휘를 역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장이라는 존재가 이 영화에 주는 활력은 실로 대단하다. 서로에게 사랑과 아픔을 동시에 주는 아휘와 보영의 관계에서 관객들에게 장의 등장은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게 하는 쉼터와 같은 것이다. 장은 ‘듣기’에 집중한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휘의 속마음은 장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보영과의 짧은 통화에서 느껴지는 아휘의 ‘행복’과, 보영을 떠나보낸 후 아휘에게 느껴지는 ‘불행’을 장은 모두 알아챈다.


보영을 떠나보낸 후에야 아휘는 장과 어울려 축구를 하기도, 술을 마시기도 한다. 아휘와 보영은 대화를 통해 소통하기보다는 비언어적 표현으로 소통한다. 그러나 그 비언어적 표현의 한계인 탓일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에 남은 응어리가 있다. 그러나 장은 다르다. 솔직하고 거리낌 없이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아휘의 응어리를 자극한다. 슬픈 이야기가 있으면 말하라며 녹음기를 주고는 표현을 어려워하는 아휘를 위해 장은 자리를 비켜준다.


그리고 녹음기를 든 아휘는 시종일관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는 눈물을 터트린다. 누구 하나 먼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휘와 보영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관객들은 아휘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히 느끼게 된다.


이런 장의 노련함과 넉살 좋음, 아휘와 보영은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발랄함에 아휘는 먼저 농담도 건넬 만큼 장에게 마음을 연다. 그리고 결국 <해피투게더>의 마지막은 보영을 상징하는 이과수 폭포가 아닌, 장의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서 얻은 장의 사진 한 장이다.







보영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나 확실한 건, 영화는 보영의 시선에서 영화를 진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보영은 철저하게 ‘보인다.’ 아휘와 장처럼 대화를 통해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지도, 독백을 통해 관객들에게 본인의 속내를 전하지도 않는다. 다만 춤을 추고, 울고, 싸우는 장면들을 통해 '보일' 뿐이다.


보영은 지겹다는 이유로 아휘를 떠나고, 지낼 곳이 없어지자 다시 아휘를 찾고, 일을 하지도 않으며 철없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보영을 판단할 근거는 터무니없이 적다. 아휘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과 소름 끼치는 모습을 모두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영 또한 분명 입체적인 인물일 것이다.


보영은 외롭다. 그래서 아휘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렇다면 아휘는 외롭지 않았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보영은 외로운 인물임과 동시에 용감한 인물이다. 불안과 회피에 짓눌린 아휘와는 다르게 보영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영화는 결국 보영의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마지막은 아휘와 장의 모습이다. 보영은 계속 아르헨티나에 남아 있다.(정확히는 남아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보영은 이 영화에서 어쩌면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누구도 보영의 감정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보영의 곁에는 장과 같은 친구도 없다. 그저 아휘가 살던 집에 혼자 들어가 이불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우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보영의 마지막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영을 더욱 애틋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Happy Together


퀴어물과 BL은 다르다. 성소수자가 받는 사회적 억압을 드러내고 다루는 것이 퀴어물이라면, BL은 그런 부분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피투게더>는 완연한 BL이라고 생각한다. 아휘와 보영은 그저 서로에게 집중하고, 서로 간의 감정에 휘둘린다. (당연하게도) 그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며 성장하는 왕가위 감독의 특기인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일 뿐이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 사설>(春光乍洩)이다. ‘봄의 풍광이 문득 드러나다’라는 의미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영국의 치하에서 벗어난 홍콩의 미래를 보여주는 해석으로도, 아휘와 보영의 ‘문득’ 드러나는 봄의 풍광과 같은 사랑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웅장하다 못해 공포심까지 느껴지는 이과수 폭포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다시금 이과수 폭포가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의 처음에 나타난 이과수 폭포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처음의 폭포는 불안하고 무섭다. 폭포의 끝에 무엇이 존재할지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보영을 상징하는 폭포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쓸쓸하다. 실로 보영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해피투게더>라는 제목이 주는 희망은 영국의 치하에서 벗어난 홍콩에게 전하고 싶은 것일 수도, 아휘와 보영, 장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홍콩으로 돌아가는 아휘도, 대만에 돌아간 장도, 아르헨티나에 남아 있을 보영도, 모두가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아휘와 보영 모두에게 화가 났다. 둘 중 누구에게도 이입할 수 없어서 장의 존재가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금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아휘와 보영의 마음이 눈에 들어왔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를 보지 않은 <해피투게더>의 팬이 있다면 반드시 봐주었으면 좋겠다. <해피투게더>에서 부족하게 느껴지는 서사의 매듭이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일 것이다.


+++) 나는 이 영화에선 장국영이나 양조위보다 장첸이 왜 이렇게 멋있는지 모르겠다. 캡 모자를 푹 눌러쓴게 너무 간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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