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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 Oct 01. 2024

내 맘대로 하는 영화 리뷰 <조커 : 폴리 아 되>


2019년에 조커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느꼈던 전율과 감탄은 그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 후속작이 나왔다. 그때 그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고, 당연히 이 영화에 대한 평가와 후기, 개인의 감상들이 나올 것이다. 과연 이 영화는 1편의 명성과 흥행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아서 플랙이라는 인물이 어떤지, 오늘은 이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조커 : 폴리 아 되>이다.


폴리 아 되 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둘의 광기, 공유정신병적 장애를 의미한다. 원작에서 그랬듯이, 조커와 할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그런 원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광기가 조금은 다르게 해석이 되곤 한다. 과연 이 영화는 원작을 알고있던 조커와 할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그 다른 면모에 집중해서 영화를 관람하기를 바란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세상이란 무대에서 폭주하기 시작한 ‘조커’와 ‘할리 퀸’을 확인하라! 
2년 전, 세상을 뒤흔들며 고담시 아이콘으로 자리한 ‘아서 플렉’은 아캄 수용소에 갇혀
최종 재판을 앞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소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리 퀸젤’은 ‘아서’의 삶을 다시 뒤바꾸며 
그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던 ‘조커’를 깨우고 ‘리’ 역시 각성하며 
자신을 ‘할리 퀸’이라 지칭하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다. 

무고한 시민을 죽인 죄로 재판에 오르게 된 ‘아서’ 그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할리 퀸’과 함께 자신, 
‘조커’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영화는 영화의 1편에서 일어난 사건이후로 2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끔찍하게 6명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뒤 아캄시 전역의 폭동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아서플렉은 재판을 앞두고 있다. 아서 플렉의 행동에 영화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공감을 해 폭동이 일어나는 등, 아서 플렉은 이른바 조커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으로 심판을 받아야하며, 변호인단은 그에게 인격적 장애, 2가지의 다른 인격으로 구분할 것을 명시한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아서는 리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두사람의 사랑이 이뤄지면서 아서는 점점 조커로서 변해가게 된다. 그리고 재판이 일어나는 어찌보면 짧으면서도 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아서 플렉, 그리고 조커의 재판. 과연 그는 아서일까 조커일까





<조커와 할리, 노래와 춤을 통해 바라보는 그들의 세계>

영화에서는 다양한 노래를 통해서 아서 플렉의 내면에 있는 조커의 상태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뮤지컬적 요소는 다소 과감하면서도, 또 새롭기도 하다. 기존에 있던 뮤지컬 영화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이 또한 호불호의 요소로 나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혼란스러운 내면의 세계를 잘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1편에서 기대했던 것과 달리 노래만 부르고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존의 1편과는는 색다른 접근방식으로, 조커와 할리 퀸은 대화없이 노래와 춤으로 소통을 한다. 첫만남때부터, 끝날때까지. 


두 사람의 세계는 관객들이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고 난해하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하게 두 사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커와 할리의 세계는 아름답고, 잔혹하며,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환상과 같은 판타지의 세계라는 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알 수 있다. 그 아름다운 세계속에서 조커는 그토록 되고 싶었던 쇼의 호스트이기도 하며, 사람을 웃기는 코미디언 이기도 하고, 원하는 사람들을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것이 아서와 리, 그리고 관객이 생각하는 조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아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홀로 갇혀 웃고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기에 아서는 현실에서도 조커가 되고자 한다. 리가 말했듯이, 관객들이 원하는 걸 보여주라는 말처럼. 광대의 분장을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법정에 올라서게 된다. 



<아서와 조커, 그들은 과연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인격일까>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아서플렉과 조커에 대해서 말한다. 변호인단, 할리, 아서플렉 본인 또한 두 사람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변호인단은 아서플렉과 조커는 다른 사람이라 얘기한다. 정신적인 문제로 인격이 나뉜 인물이라 주장을 한다. 할리는 아서플렉과 조커를 같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조커에 대한 광적인 열정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서 플렉은 자신이 조커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스스로 무너지는 인물이다. 결국 아서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아서와 조커가 같은 사람인지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이다. 관객들은 아서와 조커는 같은 사람이라 생각을 하고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이는 영화 속 리의 모습과 같다. 리는 계속 높은 산을 쌓고 관객이 원하는 것을 주라고 아서에게 얘기한다. 리는 아서가 조커라는 상상을 믿는 관객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이고, 누구보다 기대를 하고 있다. 아서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고, 그토록 바라던 조커로 완성될 것을. 그리고 누구보다 아서가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들처럼. 나약한 아서에 대한 실망감을 가지는 관객과 같은 인물이라 말 할 수 있다.



<거대한 코미디 쇼로 이뤄진 아서의 이야기>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쇼를 보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코미디 쇼를 보는 관객들로서, 조커와 아서 플렉을 나누는 변호인단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조커와 아서플렉을 같다고 생각하며 관람을 하게 된다. 아서 플렉 또한 관객이 바라듯 노래와 춤을 통해 조커를 보여준다. 그런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아서가 결국 조커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의 1편처럼 짜릿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줄거라 생각을 한다. 그런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듯, 변호인단없이 홀로 법정에 올라선다. 법정에서 판사는 아서에게 이건 코미디쇼가 아니라고 하지만, 관객들에게는 그런 판사의 모습또한 코미디의 일부로 보인다. 아서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보였을지. 


아서는 상상속에서 조커로서 할리와 같이 춤을 추고 쇼를 진행하지만, 결국 할리의 총에 맞고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아서의 상상 속 코미디쇼는 끝이 난다. 영화또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한다.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쇼가 끝나듯. 아서의 결말 또한 조커가 되지못한, 아서의 모습으로 끝이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영화의 1편에서의 명대사가 생각이 난다.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치가 있기를." 



<뮤지컬적 요소와, 아서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영화의 호불호>

영화의 호불호적인 모습이 있는 건 결국 아서라는 인물, 그리고 뮤지컬 영화라는 요소때문에 그런 것 같다. 


길게 이어진 뮤지컬적 시퀀스를 이해하기에는 반복적인 장면이라고 느낄만한 요소가 많다. 두사람의 세계에서 계속 춤을 추고 노래를 반복한다. 아서가 아닌 조커, 리가 아닌 할리, 둘의 교감이 이어지지만 관객들은 두 사람의 세계를 이해를 하다가도, 대사가 없이 노래로 소통을 하는 모습에서 힘겨움을 느낀다. 그렇다고 뮤지컬 영화를 기대하고 보기에는 단체군무도 없고, 보는 재미또한 떨어진다. 

결국 뮤지컬 적 시퀀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한것인지,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반복되는 노래속에서 영화의 흐름은 계속 뒤쳐지고 만다. 


관객들은 전작을 통해 조커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화려한 모습과, 강렬한 악역을 기대하고 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나약한 아서의 모습과 강렬한 조커의 모습을 겹쳐서 보여주지 않고, 따로따로 구분해서 보여준다. 상상 속 조커의 모습은 강렬하고 관객들이 원하던 전작의 조커와 비슷하다. 누구와도 다른 강렬한 악역으로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지만, 계속해서 현실 속 아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주인공병에 미쳐 살고 있는 정신병자에 불과하다. 전작에서 그랬듯 아서가 조커의 분장을 하고 결국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기대하지만, 아서는 높은 산에 올라 그 높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내려와, 조커가 아닌 아서로 되었기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호불호적 요소에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약한 아서의 모습을 할리가 싫어했듯, 관객들도 싫어하고 있는 것이다.




전작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을 안겨줄 영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의 영화로서, 이 영화를 보고 과연 아서, 그리고 조커에 대해 생각을 한번즈음은 해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두 사람은 같은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우리는 이 영화를 누구의 이야기로 생각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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