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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그녀 Jan 25. 2024

경주에 제주 바다가 있다

경주하면 첨성대와 불국사, 석굴암을 필두로 천년의 신라 역사와 함께했던 여러 유적지가 떠오른다. 최근에는 황리단길의 볼거리, 먹거리가 빼놓으면 안 되는 여행의 버킷리스트다. 허나 경주를 방문한다면 ‘바다’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그간 여름마다 서울 도심의 뜨끈뜨끈한 열기를 피해 속초로, 양양으로, 삼척으로 피서했기에 동해 바다는 익숙하다. 시릴 정도로 차서 여름에도 애들 두세 살 때는 오래 놀지 못했던 속초 바다, 모래놀이 육아하며 젊은이들의 서핑하는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흘끗 댔던 양양의 서피비치('10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데크길 따라 걷던 정동진 해안단구길. 갯벌 넓고 모래 섞인 서해 바다와 달리 맑고 새파란 물과 단단한 바위가 어우러지는 동해 풍경이 좋았다. 이렇듯 동해에 대한 호기심이 적으면 시내에서 40여분이나 떨어진 경주 바다는 여행객 입장에서 '굳이 갈까?' 망설여지는 후보지다. 짧은 일정으로 머문다면 더욱이 그렇다. 이날은 두 아이와 경주 한 달 살기 중 모처럼 남편(운전에 서툰 내가 매우 의지하는 드라이버)이 함께였고, 겨울 속 봄날처럼 따뜻한 날씨였다. '그래! 오늘이다!' 우린 즉흥적으로 경주 바다를 향했다.


여행 일정 계획은 늘 창대하지! 송대말 등대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




송대말 등대를 기점으로 아래로 내려오며 양남 주상절리를 찍기로 계획했다. 궁둥이 무거워 한 곳에서 자리 뜨기 어려운 우리의 여행 감성으로는 모든 스폿을 찍기 불가능하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1~2곳 정도 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가볼 만한 곳이 더 있는지는 빠삭하게 조사하고, 이변이 생겨 한 두 곳으로 모자랄 수도 있으니 계획은 야심 차게 잡는다. 저 멀리 감은사지 3층석탑의 모양을 본뜬 등대가 기와지붕 2층 건물 위에 솟은 모습이 보인다. 그 옆으로 평범한 모양의 하얀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이제는 빛을 내지 않는 송대말등대다. 건물은 빛 체험 전시관으로 쓰이고 솟은 등대가 이곳 감포 바다를 비춘다. 아이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달린다. 바다를 보면 달려가고픈 마음은 본능인 건가. 늘 바다를 보면 일렁이는 파도에 마음도 들썩이며 달리고 싶다. 등대에 가까이 갈수록 저 아래로 깎아 내지르는 풍경이 보인다.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에 절로 '와'한다. 가까운 바다는 맑아서 아랫 돌이 훤히 비치고 멀리는 햇살로 보석밭이다. 배가 가득 정박해 있는 감포항으로 유유히 배 한 척이 들어간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새하얀 갈매기가 점박이처럼 붙어 있는 거무스름한 바위다. 거무스름? 제주도도 아니고 바위가 왜 검단말인가? 경주 바다에는 머나먼 과거(공룡 이야기 나올 때나 들어봄직한 무려 신생대 시절)에 생긴 주상절리가 있다.



주상절리 키즈카페 즐겼던 아이들



보통 송대말 등대를 검색하면 감은사지 3층 석탑 닮은 건물이 나오게 사진을 찍거나 빛 체험 전시관 소개를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건물을 패스하고 주상절리로 내달린다. 등대에서 바다까지는 아슬아슬한 시멘트 계단을 조심히 딛고 내려가야 한다. 그간 본 주상절리는 절벽 아래로 기둥처럼 높다랗게 서 있어 멀리서 보며 눈으로만 즐겼다. 여긴 주상절리가 바닥에 낮게 깔린 터라 마치 정글짐을 오르내리듯 높고 낮은 돌기둥을 아이들이 넘나 든다. 부모 보기엔 불안한데 아이들은 암벽 등반 하듯 신났다. 파도가 남기고 간 불가사리, 해초 줄기가 말라 걸려 있어 보물찾기 하듯 두리번댄다. 잠깐 바다로 눈 돌렸다가 이내 저만치 가버린 아이를 눈으로 좇는다. 가파른 곳에 스스로 올랐다는 성취감에 잔뜩 들떠 있는 얼굴에 ”이제 가자 “라는 말을 삼키고 "조심히! 천천히!" 정도 외쳐준다. 어느새 주상절리 끝 바다와 만나는 높은 위치에 오른 남편이 소년 같아 사진을 남겨본다. 바다 쪽에서 보니 검은 절벽 위에 얹어진 송대말 등대가 새하얗다. 아이들 이마에 땀이 맺혔다. 양손에는 전리품이 가득하다. 이제쯤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 첫째의 화장실행으로 간신히? 주상절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상절리 키즈카페가(이제 우린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어찌나 좋았던지 빛 체험 전시관을 둘러보고 점심시간대가 훌쩍 지나 허기가 찾아왔음에도 다시 내려가자고 야단이었다. 가만 보면 여행에서는 의외의 장소가 우리만의 핫플이 된다.


바다 쪽에서 바라보는 등대가 검은 바위와 대비되어 더욱 하얗다



경주에는 송대말 등대 인근 외에도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양남읍에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부채꼴 모양의 주상절리는 에메랄드 빛 투명한 바닷물과 어우러져 조각 예술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옆으로 뻗고, 눕고, 기울어져 있는 여러 모양새의 주상절리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드물다니 희귀한 건 놓치면 안 되지. 전망대에서 잠깐 보기 아깝다. 따뜻한 계절에 다시 와서 주상절리를 따라 읍천항에서 하서리까지 1.6km가량(도보 30분) 이어지는 '파도소리길'을 걷고 싶다. 바다와 인접한 데크길을 걸으며 중간중간 셔터를 누르고 벤치에 앉아 바다를 느낄 수 있을 거다. 결혼 전 후 약 5년 이상 매년 제주도에서 짧은 시간씩 머물렀다. 올레길도 여러 코스 걸었다. 제주가 가진 자연을  걸으면서 나누는 대화와 버물리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인파가 쏟아지고 물가가 급격히 오르면서 발걸음을 놓은 지 여러 해다. 경주 바다를 보며 제주를 떠올렸다. 속초에 비해 포근한 겨울 바닷바람 때문인지, 파도소리길에서 올레길을 떠올려선지, 까만 바위가 아래로 비추이는 맑은 물 까닭인지 오감으로 느껴지는 경주 바다가 제주의 그것과 닮았다.




바다 보며 먹는 컵라면은 꿀맛!



집에서 싸 온 유부초밥을 들고선 나정 고운 모래해변에 갔다. 바다와 인접한 편의점이 있기에 고른 해변이었다. 야외에서 먹는 유부초밥과 컵라면의 조합은 항상 옳다. 각자 기호대로 컵라면을 하나씩 골랐다. 짜장라면에서 벗어나 진라면 순한 맛까지 맵기 레벨에 도달한 둘째까지 뜨거운 물 부은 라면을 조심스레 옮겼다. 해변가 야자수 파라솔에 앉아 자린고비가 굴비 보듯 후루룩 컵라면 한 줄기 후 바다를 보곤 했다. 모래놀이를 기대하는 아이들이 서둘러 먹고 빠진 자리에 남편과 캠핑의자를 깔고 앉았다. 나정 고운 모래 해변이 여행의 필수 코스로 떠오르는 곳은 아니기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사람이 많으면 신경 쓸 것이 많아 그곳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 바다가 좋다.(일부러 유명한 해변에 사람이 많아 근처 조그만 다른 해변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기자기하고 고운 돌 찾는 아이들의 모습을 감상했다. 곧이어 남편과 아들은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진다. 팔을 휘두르며 점점 더 멀리 던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부른 배와 마음으로 만족감이 들어찼다. 한두 시간 흘렀을까. 바다를 풍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어느덧 해가 졌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면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져온 기분이다.



서둘러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다. 아버지 태종무열왕에 이어 진정한 삼국통일을 이루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수장릉을 남긴 문무왕. 바다에 왕의 무덤을 두었다는 것은 유일하다. 그리고 실제 1960년대에는 유골함이나 부장품을 넣은 석함을 놓았을 만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발굴 작업도 했다니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발굴하러 배를 타고 나선 그 당시의 뉴스 영상을 보니 바닷속 거친 바위로 되어 있는 문무대왕릉이 자연이 아닌 문화재로 보였다. "엄마! 저 빛이 뭐예요?" 해가 으스름 자취를 감춘 때였다.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해변가에 돗자리들이 열 군 데 이상 듬성듬성 놓여있고 사람들이 촛불을 켜고 있다. 무속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 간간히 무속인들의 점집이 있었다. 예상컨대 문무왕의 기운을 받으려 해변에 찾아와 무속행위를 하는 것이다. 문화재 인근의 낯선 풍경에 당황스럽고 으스스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무속행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해변을 걷기가 꺼려졌다. 문무왕의 죽음 후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의 기운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모인다니. 무속 신앙에 동의하지 않아서 인지 문무대왕릉 풍경을 해치는 게 씁쓸해서 인지 서둘러 여행 일정을 마무리했다.




 


경주 바다에서 감은사지 3층석탑도 못 봤다. 양남 주상절리군도 다음을 기약했다. 전촌 동굴에서 바라보는 바다도 즐기지 못했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파도소리길도 못 갔다. 비록 계획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일정 수행이었지만 아쉽진 않다. 아이들 양손에는 바다에서 얻은 보물(이라 부르고 부모는 쓰레기가 될 거라 예상하는 조개껍질 등)이 가득하고, 충분히 놀았다는 만족감이 서린 얼굴이다. 큰 기대하지 않은 경주 바다에서 여러 차례 감탄사를 흩뿌렸다. 일정의 반도 못했지만 제주 바다를 떠올릴만한 기가 막힌 바다를 만났다. 오늘 참 좋았다.


곧 보러 갈게! 제주 닮은 양남 주상절리야!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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