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영화 톺아보기
자본주의의 모순과 폭력성을 우화로 그려낸 영화 <옥자>에선 급박하고 심각한 상황에서 기이하고 신나는 음악이 쓰인다. 봉준호 감독이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속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마케도니아의 브라스 밴드와의 협업을 과감히 선택한 것이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언더 그라운드>(1995)에서도 비극 같은 상황에서 신나는 음악이 끊이질 않는데, 영화가 워낙 실제와 환상이 뒤섞이다보니 오히려 그런 아이러니가 어울린다. 주인공 마르코는 사기꾼으로서 지하실에 사람들을 가두고, 무기를 팔고, 티토의 측근으로서 권력도 쥐어보고 사랑도 강제로 쟁취한다. 이렇게만 보면 그는 극악무도한 악인이지만 영화는 그를 나쁘게 비추는데 집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가 최후를 맞이할 때 타고 있는 휠체어는 활활 불에 타버리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빠진 것 마냥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회전한다.
낙원 같은 섬에 모여 모두가 재회한 엔딩장면에서 블래키는 자신의 지난 과오를 용서해주겠냐는 친구 마르코의 물음에 ‘용서는 하지만 잊을 수는 없다’는 답을 한다. 이때의 용서는 형제처럼 지낸 두 친구 사이에서가 아닌 당시의 유고 연방 구성국과 내전으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시민들 사이에서의 용서에 대한 말처럼 들린다. 또한 마르코가 동생인 이반에 구타당해 죽어가며 남긴 ‘형제를 죽이는 것보다 잔인한 전쟁은 없다’는 말에서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들의 맹목성과 생존본능이 극에 달 하면 이는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할 비극으로 이어진다. 마르코의 불안정하고 양면적인 언행은 특정 개인의 이기심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법과 질서는 유효했을까? 전쟁은 당연하다고 착각했던 일상을 앗아간다. 이 빽빽하고 정신없는 영화보다도 더 정신없는 전시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살길을 찾으려 분주하게 움직인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들의 행동은 흔히 ‘인간다움’하면 떠올리는 배려와 측은지심과도 같은 인간의 선한 면을 담보하지 않는다. 배신과 질투, 외면 등 또 다른 비극을 낳을 짓을 인간은 한다. 동시에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 안에서도 작은 사회를 꾸리며 자신들만의 일상을 누리는 것도 인간스럽다. 마르코와 블래키가 함께 꾸는 상상같은 낙원에서의 축제도 참으로 인간스럽다. 혼돈 속에서 무질서한 인간들이 질서를 되찾고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할 때 우리는 앞으로의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에는 용서에 관한 인상 깊은 대사가 나온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석방하는 것과 같은데, 우리가 풀어준 그 죄수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훗날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상처 받았다고 해서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현재는 계속된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를 한 후엔 그 고통 속에 나를 두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잊지 말되, 나아가자. 그래서 쿠스투리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영화 <언더 그라운드>속에 담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