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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제이 Jul 03. 2024

02. 고전적 페닐케톤뇨증


우리 아이는 고전적 페닐케톤뇨증.

* 페닐케톤뇨증은 단백질 속에 약 2~5% 함유되어 있는 페닐알라닌을 분해하는 효소의 결핍으로 페닐알라닌이 체내에 축적되어 경련 및 발달장애를 일으키는 상염색체성 유전 대사 질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지능 장애, 피부와 모발 색 변화, 경련 등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행히 선천성 대사 이상 검사를 했고 초기에 발견이 되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페닐케톤뇨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선생님께서는 약으로도 수치가 떨어지는지 확인을 해주셨는데 약으로 수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평생 식이요법을 해야 하는 고전적 페닐케톤뇨증이었다. 약으로 수치가 떨어지면 자유롭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먹으면서 약으로 수치를 낮춰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마저도 안 돼서 정말 속상했었다. 하늘은 나한테 정말 왜 이러나 싶었다.


우리 부부는 그 이후에도 가끔 한 번씩 이야기를 했다. 알약으로 수치가 떨어졌으면 참 좋았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지금 다시 알약을 먹였는데 그게 갑자기 몸에서 받아들여져서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상상말이다.






11월 8일 출산.

처음 산부인과에서 11월 17일에 나온 검사 결과는_ 12.8

그 검사 결과를 받고 대학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했지만 청주 병원으로 빨리 가보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입원을 하며 또 피검사를 했다. 11월 23일에 조효소 검사를 했는데 반응이 없다고 쓰여있다. 그게 아마 약이었나 보다.

11월 25일 수치를 보니 4265. 그때의 정상 수치는 35~283이었는데 정말 수치가 높았다. 입원을 해 있으면서 다양한 검사를 해본 것 같은데 결국은 고전적 페닐케톤뇨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입원하는 날. 그즈음에 국민 건강 보험 공단에 가서 '선천성 산정특례'를 신청했다.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제도이다. 5년마다 신청을 해야 하고 벌써 5년이 지나 몇 년 전에 또 한 번 신청을 했다. 

보건소에도 진단서와 소견서 정도를 제출하고, pku분유와 저단백 햇반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도 pku분유를 먹이고 있고, 이유식을 할 쯤에는 저단백 햇반도 받아서 지금까지 먹이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게 없었을 텐데 이런 혜택들이 생겨나고 지원받을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pku분유와 저단백 햇반은 평생 먹어야 하는데 현재는 만 19세까지만 지원이 된다고 한다. 점점 혜택이 좋아져 지원받을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길 기도해 본다.


모유가 좋다고 필요하다고 해서 짜두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짜서 얼려둔 모유도 가져다 드렸던 것 같다. pku분유와 모유를 섞여 먹이기 시작하고 수치가 떨어졌다. 선생님께서 모유가 좋다고 하셨지만 잘 나오지 않아서 태어나서 4~5개월 정도까지 먹이고 먹이지 못했다. 참 속상했던 때이다.

12월 3일 모유수유 투여시작 후 46까지 수치가 떨어졌고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수치가 너무 낮게 나오는 날도 있고 초반에는 들쑥날쑥 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초반 4000대의 수치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정말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수치가 떨어져 정상으로 되었고 퇴원을 했다. 친정 엄마 집에서 좀 더 지내다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초반에는 정말 한 번씩 '저 애랑 어떻게 죽을까?'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죽는 법을 찾아보기도 하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쁜 아이의 얼굴을 보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잘 지내야지.' 하다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꾸준히 1~2년간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지냈던 것 같다. 내가 이러려고 아이를 낳은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많았다.


조금만 열이나도 수치가 확 올라가 버려서 병원에 바로 입원을 했어야 했고, 병원에 가서 입원을 하게 되면 수치가 떨어져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있어야 했어서 가면 꽤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다. 나와 둘째 아이만 병원으로 갔고, 입원을 하면 첫째 아이는 늘 할머니댁으로 가야 했다.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하니 일터로 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몇 년은 정말 집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병원에 많이 가기도 했고, 입원도 많이 했었다. 둘이 그렇게 병원에 있으면서 밤에는 혼자 울며 그런 안 좋은 생각들을 했다. 아이가 아파서 울면 나도 같이 울기도 했다. 그냥 이런 상황이 싫었고, 힘들었고, 슬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난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페닐케톤뇨증의 아이를 키우며 잘 살아낼 자신도 없었고, 그렇다고 같이 죽지도 못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우리는 잘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괜찮을까? 끊임없이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항상 답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가,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던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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