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닐케톤뇨증이라는 병명을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청력까지 문제가 있다고 했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해주는 검사인 것 같다. 첫째 아이를 낳고도 청력검사를 했었고, 둘째 아이를 낳고도 청력검사를 했었다. 그런데 둘째 아이 청력검사에 문제가 생겼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알지도 못하는 병에 귀까지 안 들린다니. 나는 정말 그때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어떤 정신으로 지내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첫째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어서 정신을 놓지는 않았나 보다.
늘 평범하고 운이 좋았던 나에게 갑자기 불행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사이 둘째 아이는 수치가 너무 높아 바로 입원을 했고 다행히 수치가 정상으로 떨어지며 몇 주가 지나고 퇴원을 했다. 한 고비를 넘긴 듯했지만 바로 또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1월 11일 대학병원에 난청 검사를 예약해 두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고 했었다. 무섭고 불안했다. 그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우리 가족의 목소리도, 문 닫는 소리도, 어떤 소리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까 봐.
난청 검사를 예약해 둔 날이 되었다. 전날 눈이 많이 내려 쌓여있었다.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었는데 차가 시동이 안 걸린다. 하필 이런 날에 시동이 안 걸릴게 뭐람. 예약한 시간은 다가오고 시간 맞춰 가지 못하면 검사를 받을 수 없었다. 예약을 다시 할 수는 있겠지만 언제까지 또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고, 혹여나 결과가 좋지 않는다면 빠르게 치료를 했어야 했기에 꼭 예약한 날 검사를 받았어야 했다. 택시를 잡으려 해도 어쩜 그날따라 한 대도 보이지 않는지.. 그 추운 날 아이를 꼭 안고 우리 네 식구는 택시가 있는지 목이 빠져라 쳐다보며 걸어갔다. 집에서 버스정류장이 멀지 않았는데 병원이 가깝기도 하고 택시가 없으니 버스라도 타고 가자고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도 택시를 잡으려고 보고 또 봤지만 그 많았던 택시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없는지 한 대도 지나가지를 않았다. '참, 되는 일도 없지. 이제는 하다 하다 택시 하나도 마음대로 못 탄다니.'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갓난아기와 어린 첫째 아이를 데리고 버스에 탔다. 병원이 가까워서 몇 정거장 안 가서 내릴 수 있었다. 다행히 예약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무사히 난청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까지 가는 길도 정신이 없었고, 도착해서도 정신이 없었다.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신마취도 걱정되었고, 결과도 좋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난청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흑흑.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청주 병원에 계신 원장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인데 이것도 난청 검사 전에 해주신 건지 후에 해주신 건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페닐알라닌 수치가 높아지면서 귀까지 막아버린 거예요. 수치가 정상으로 떨어지니 당연히 귀도 잘 들릴 수밖에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입원을 바로 해서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 덕에 청력에는 더 이상 문제가 없게 된 것이었다. 지금은 작은 소리도 잘 듣는다.
이 애미는 어떻게 죽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이 작은 아기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검사도 잘 받고 잘 견디고 잘 이겨내고 있었다.
+
가장 큰 고비를 잘 넘겼다.
'높았던 페닐알라닌 수치를 초기에 정상으로 낮춘 것.' 이게 가장 중요했었는데 빠르게 치료를 해서 수치를 정상으로 낮춰주셨고 그로 인해 뇌에 손상이 가지 않고 정상으로 자랄 수 있었다. 청력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었는데 수치가 정상화되며 아무 문제 없이 잘 들을 수 있었다. 뭐든지 골든타임은 있는 법이다.
초반에 청주 병원에 갈 때마다 원장님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하셨는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초기에 잘 치료해서 아무 문제없어요. 이제는 걱정할 거 없어요."
갑자기 불행의 쓰나미가 밀려와 불행이 우리를 삼켜버릴 줄 알았다. 거기에서 허우적대다가 버티지 못하면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이를 치료해 주시는 선생님들도, 이 작은 아이도 저렇게 최선을 다해서 같이 살자고 살아보자고 하고 있는데 엄마인 내가 불행의 쓰나미에 먹혀 죽어버리겠다고 나를, 저 작은 아이를, 우리를 포기해 버리겠다고,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고비가 올 때마다 우리는 슬프고,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저 아이와 함께 최선을 다해 한 고비씩 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매일 죽고 매일을 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