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닐케톤뇨증은 초반에 잘 치료해 주면 뇌 손상이 없어서 정상으로 클 수 있다고 했다. 매달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해야 하고, 평생 식단조절을 해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초기에 치료하지 못하거나 안 한 아이들은 머리색도 노란빛을 띠고, 뇌에 손상이 가서 제대로 말을 하거나 앉거나 서거나 할 수 없다고 들었다. 대소변도 못 가리고, 심한 경우 사망까지 이르게 된다고.
우리의 경우, 초기에 빠르게 잘 치료를 해서 이제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뒤집기를 할 시기쯤, 앉을 시기쯤, 서야 할 시기쯤, 말을 해야 할 시기쯤, 기저귀를 떼어야 할 시기쯤, 겉으로 내색한 적은 없지만 속으로는 내심 걱정은 있었다. 앉을 수 있을까? 말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아이는 이때쯤 했었는데 하며 둘째 아이도 이쯤 하겠지? 생각했다. 조금 늦는 것 같으면 혼자 또 걱정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일들이 휘리릭 지나갔다.
집에서 어느 평화로운 날, 남편이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문에서 둘째가 뛰어나오면 엄청 감격스러울 것 같아. 그치?"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우리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둘째 아이를 보며 그런 상상을 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당연히 이런 처음의 순간들이 감격스러울 테지만, 우리 부부에게 둘째의 처음 순간들은 정말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 당연한 처음의 순간들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서로 내색하지 않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남편도 마음속으로는 '혹여나 그런 순간들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었던 것 같다.
뒤집기를 할 때도, 앉는 것보다 일어서는 걸 먼저 하려 했을 때도, 할 발 한 발걸음을 걸을 때도, 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할 때도 말로 다 하지 못할 만큼 감사하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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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를 뗄 시기가 다가왔다. 첫째 아이는 30개월쯤 수월하게 떼서 둘째 아이도 그쯤 기저귀를 떼어볼까 싶어 시도했지만 변기 거부가 심해서 잘 안 됐다. 아이마다 다를 수 있으니 좀 더 천천히 해보자 싶어 몇 달 후에 다시 시도를 했다. 38개월쯤부터 소변을 작은 변기에 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조금씩 변기에 하기는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44개월쯤 그러니까 나이로는 5살쯤 소변은 변기에 하기 시작해서 이번에야 말로 기저귀에서 벗어나겠구나 했지만 나의 착각이었다. 낮에는 소변정도 잘했는데 응가는 여전히 기저귀를 찾았고, 밤에는 더 쉽지 않았다.
6살이 되고도 계속 밤 중에 이불에 쉬를 했다. 겉으로는 좀 늦을 수도 있지. 아이마다 속도가 다 다르니까. 했지만 속으로는 '왜 소변을 못 가리는 거지?' 불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져서 어떻게든 해야겠다 싶어 둘이 매트를 깔고 바닥에서 자면서 아이가 쉬를 하면 자다가 일어나서 아이 엉덩이를 씻기고 매트를 닦고 했다. 그렇게 하다가 아이도 잠을 못 자고 나도 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였다. 마음을 좀 내려놓고 '그래 우리 천천히 하자.'하고 다시 기저귀를 채웠다. 대신 관련 동화책도 읽어주고, 매일 자기 전에 "밤에 자다가도 쉬가 마려우면 꼭 화장실에 가서 쉬를 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언제 기저귀를 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은 또 흘렀고, 6살 끝무렵 드디어 기저귀를 뗄 수 있었다. 지금은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화장실로 간다.
잘 자라고 있지만 좀 늦으면 걱정이 되는 건 여전하다. 언제쯤 마음을 푹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뒤집고, 옹알이를 하고, 앉고, 서고, 걷고, 뛰고, 말을 하고, 기저귀도 떼고, 생각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배우고 있음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