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볼 수 없는 히어로의 이야기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직장에서 일어났던 해프닝. 둘이 함께 알고 있는 친구들의 결혼을 비롯한 사는 이야기 등등. 그런데 친구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아이를 데려왔다. 차라리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기라면 나았을까? 당황스럽게도 친구가 데려온 아이는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나이 또래의 청소년 아이였다. 그 아이를 옆에 두고 과연 처음에 얘기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다 할 수 있을까?
2016년도에 ‘데드풀’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 마블은 청소년 관람 불가 히어로물이 흥행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회사는 흥행의 여부를 관객 수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원수가 제한되는 높은 등급은 흥행의 한계가 있다고 봤다. 게다가 만화를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많이 볼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세세히 챙기던 마블이 정작 놓치고 있었던 것은 그 만화를 봤던 아이들이 이미 다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만화에서 보았던 캐릭터들이 현실 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 (2009)’에 나왔던 데드풀은 ‘수위가 높은 농담을 일삼던’ 원래 캐릭터와 전혀 다르게 ‘진지한 사람’으로 묘사된 까닭에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데드풀을 연기한 배우이자 프로듀서인 라이언 레이놀즈는 끈질기게 마블에게 만화에 나왔던 캐릭터 그대로의 데드풀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제의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저예산으로 데드풀 영화를 완성하게 된다. 제작팀은 불사신의 몸으로 자신을 마음대로 자르고 수위 높은 농담을 하는 캐릭터의 매력을 최대한 창의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극장가로 나간 데드풀은 예상외로 엑스맨 시리즈 중 제일 적은 제작비를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흥행 성적을 손쉽게 달성해버린다.
조연으로 나왔던 데드풀의 19금 성공 덕분에 17년 동안 마블의 엑스맨 시리즈의 간판 캐릭터였던 울버린의 영화 ‘로건’이 19금 딱지를 붙이고 본격적으로 영화관에 등장하게 된다. 인체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울버린은 수많은 살인을 한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알코올 중독자였다.
하지만 12세 이상 청소년 관람가 판정 영화에 출연하면서 손등에서 나오는 손톱으로 나쁜 악당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강한 사람 정도로만 표현되었다. 그러나 19금 영화 ‘로건’에서 사람들은 그 손톱이 얼마나 잔인한 도구였는지 알 수 있다.
지나칠 정도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살육의 현장은 기존의 엑스맨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액션과는 다르게 보면 볼수록 힘들고 피곤해진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 통쾌하고 비현실적인 전투가 아닌 생존을 위한 싸움 속에서 나이가 든 울버린은 끝없이 공격하고 공격당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그 모습에서 결국 관객들도 하는 수 없이 이 한 남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
아이가 오해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게 설명하기 어려운 어른의 사정이란 것도 있다. 아이가 어른 또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동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를 청소년 관람 가에서 하는 것은 김빠진 맥주와도 같은 싱거운 이야기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19금 등급을 선택하는 순간 대화에서 미성년자의 존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 어른이 된 아이들이 등장하게 될 따름이다. 그때서야 영화도 진지한 어른의 세계를 아무런 여과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불편한 영화에서 동감할 수 있는 영화로의 변화는 이렇게 이뤄진다. 우리의 영화 중에도 이렇게 19금으로 하면 좋아질 영화는 뭐가 있을까?
출처 : 시사위크(http://www.sisa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