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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J Dec 31. 2022

직장생활에서 나를 다스렸던 생각들

 - 나의 브런치북에서

[생각 하나] 법칙 적용자 v. 성찰기회 제공자


강원도의 어느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방생한 물고기가 멀리 가지 않고 한곳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가두리양식장을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받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려니 할 것이고, 혹자는 정말로 그렇게 오해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어떤 집단에서든 대략 열의 아홉은 나를 이해하고 지지하고 신뢰해도 그중의 한 명은 이상하게도 나를 오해하고 왜곡합니다. 편의상 이를 9대1의 법칙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열의 한 명에 속하는 사람 중에는 그야말로 이유 없이(또는 의도적으로) 나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는 나도 모르게 내가 그들을 서운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 없이 그러는 사람들은 그냥 법칙을 적용해주는 사람이라고 편하게 간주하면 되겠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언행을 상식의 기준으로 분별하여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극단적인 인식의 틀을 적용하여 왜곡하거나 특히 어떤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나를 왜곡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떤 진실한 해명도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오해하고 왜곡한다면 그가 법칙 적용자인지 성찰 기회 제공자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아울러 내가 누군가에게 혹시 법칙 적용자로 간주되지는 않을지 한 번쯤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생각 둘] 평판을 관리한 사람 v. 신념을 관리한 사람 


 갑, 을, 병 세 사람이 있습니다. 갑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 장면을 을과 병이 목격합니다. 을은 갑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갑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눈감아 줍니다. 병은 옳지 못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갑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갑도 사람인지라,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을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는 반면,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병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집니다. 갑도 사람인지라, 다른 사람들에게 을과 병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을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하는 대신, 병에 대해서는 같은 이야기라도 부정적인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갑을 통해 을과 병을 접한 사람들은 내막도 모르고 을을 괜찮은 사람으로, 병을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해 버립니다. 즉, 을은 좋은 평판을 갖게 되었고, 병은 좋지 못한 평판을 갖게 되었습니다. 평판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집단에서 인기가 많은 리더라면 한 번쯤 그 면모를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도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인기가 없는 리더도 그 면모를 제대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집단 대다수의 편에 서 있기에 인기가 있는 것이고, 그 반대편에 서 있어서 인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내적 또는 외적 매력의 유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말 그대로 인기에 영합하여 소신을 펼치지 않았기에 인기 있는 리더일 수도 있고, 버려질 용기를 갖고서 소신을 지켰기에 인기가 없는 리더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필요한 리더는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사람 중에 진짜 사람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고, 호평이 자자한 사람 중에 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공정하고 반복된 체험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어쩐지 진정한 지도자감은 조명이 비치지 않는 무리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논어 <위령공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미워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생각 셋] 폴터가이스트, 그리고 떠나는 그대    

 

 폴터가이스트는 '시끄러운 영혼'이라는 뜻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물건이 움직이거나 소음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 담긴 노트북 가방의 바깥쪽 주머니에 무선 이어폰 케이스를 넣고 지퍼를 채우지 않은 채 기차의 선반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는데, 가방을 내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케이스가 툭 빠져버리는 경우와 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잃어버릴 상황이 아닌데도 그 희박한 가능성으로 소지품이 내 곁을 떠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걸 믿지는 않지만, 분실한 물건을 찾아 헤매다가 짜증이 나면 자신에 대한 불만을 다른 대상에 전가하듯, "폴터가이스트가 장난을 치나" 하며 무의미한 말을 내뱉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진짜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도저히 물건이 없어질 상황이 아니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이 난 이후에 그렇게 생각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물건이 자주 분실되는 나의 생활 장소에 CCTV를 설치하고, 나중에 화면을 돌려보면 거기서 폴터가이스트의 단서가 보일 가능성보다는 그 대신에 수십 년간 굳어진 나의 잘못된 습관 하나가 눈에 띄게 될 가능성이 더 클 것입니다. 나에게는 노트북 가방의 바깥쪽 주머니를 잠그지 않는 묘하게 안 좋은 습관이 있었고, 열진 주머니에서 물건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건만이 우리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 곁을 지켜주는 대부분의 고마운 사람들과 달리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오해하거나 나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고 나를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묘한 기운이 작용했다는 주술적인 생각을 하는 대신에, - 대다수의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내 곁을 지키지만 - 어떤 자극에 민감한 사람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오랜 시간 동안 굳어져 버린 대인관계와 관련된 안 좋은 습관이 나에게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생각 넷] 분노의 신호


<단테의 신곡>은 주인공 단테가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천국, 그리고 그 중간단계인 연옥을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단테는 살인과 같이 우리사회에서 매우 중한 범죄로 취급하는 죄뿐만 아니라, 시기, 분노 등도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지은 죄의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타인의 부당한 처사로 인해 화가 나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분노는 보통 증오의 감정을 동반하게 되고, 증오는 증오의 대상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죄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끄럽지만, 아주 짧은 순간일지언정 분노를 유발한 사람에 대한 저주 섞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분노에는, 정당하고 필요한 분노, 병적인 분노, 자제력 부족에 따른 불필요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분노는 논외로 하고, 세 번째 분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그 순간 그것을 상대방에게 비이성적으로 터뜨리고 나면, 한동안은 너무나 당연히 상대방에게 합당한 행동을 취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 상황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의 언행을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한 부분 이해하게 되며, 그 상황에서 자신이 대처한 반응이 지나쳤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이제부터는 잠깐 ‘생각을 중단’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분노의 감정이 걷히고 훨씬 더 세련된 대처를 하는 자신을, 아니 때로는 아무런 대처도 필요 없음을 느끼고 싱겁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임스 글릭의 저서 <카오스>를 보면, ‘소용돌이는 항상 순조로운 흐름과 섞여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간의 관계도 자연계의 현상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마치 파동 그래프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변화하고, 가끔 그래프가 커다란 진폭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뒤돌아보면 그저 일시적인 이탈점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불의인 경우가 아니라면, 논리적으로 용서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어렵지만 무조건 용서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무조건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는, 용서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 다섯] 순리와 예외


 뜻밖의 일들이 자주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예상이 빗나가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에는 순리보다 예외가 많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관점을 바꾸어 보기로 합니다. 예상이 빗나가는 현상이 어쩌면 이 세상의 순리이고, 예상대로 들어맞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은 나에게 예외적인 시련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로써, 순리대로 세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뜻밖에도’ 나의 기대가 들어맞는 예외적인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의 틀이 바뀝니다. 그동안 순리가 고집스럽게도 나에게 작용했다면, 이젠 나에게도 예외가 하나둘쯤 생길 것입니다. 생각했던 대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생각 여섯]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타인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지은 잘못은 나에 대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굳이 고맙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을 기회를 주었으니까. 물론,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창조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치기만 하면 된다면,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저지르고 나서 뉘우치면 그만이라고 무의식이 속삭일 수 있습니다. 나의 잘못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기에, 용서를 받으려면,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통스럽지만 나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개념은 그래서 공평해 보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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