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밤새 계속됐다. 새벽에도 시내 쪽에서 음악과 함성 소리가 들렸다. 5시에 알람을 맞췄던 우리는 한 시간 늦잠을 자고 6시가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남은 식재료를 나눠 챙기고 이틀 전 함께 샀던 견과류도 반씩 나눴다.(이제서야!) 함께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신 후 길을 나섰다.
계획대로면 로스아르코스까지 걸어야 했지만 그곳의 공립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드버그를 물렸다는 후기를 보기도 했고, 공립은 분명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었다. 계획을 완전히 바꿔 오늘은 세 시간만 걷고 고요함을 조금 더 누리기로 했다.
앞서가는 Laura.
멋진 대장간을 만났다. 사장님이 직접 쇠를 달구고 두드려 각종 장식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Laura는 산티아고 끝까지 가서도 이렇게 멋진 기념품들은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놀랍게도 전부 쇠로 만든 장식들이다.
감탄하며 구경하고 있는데 Laura가 기념품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목걸이를 골라 길이를 조정한 후 내 목에 직접 걸어주었다. 이 길과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선물이라고 했다. 감동을 받은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다. 돌아보니 Laura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마치 작별을 체감한 것처럼 내게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Laura가 사준 목걸이.
이라체 수도원이 나왔다. 와인 수도꼭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늦게 일어나 나온 탓에 와인은 이미 다 떨어져 있었다.(와인을 마시고 싶다면 일찍부터 가야 한다.)
와인 수도꼭지.
Laura가 수도원 내부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잠시 찢어졌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시간.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천천히 걸었다.
그림 같은 풍경.
오솔길로 들어가는 나.
뷰가 멋진 바를 만났다. 마침 Laura가 도착해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목걸이에 대한 작은 보답으로 또르띠야와 커피를 샀다.
식사를 마치고 걷는 동안 Laura와 서서히 멀어졌다. 그는 오늘 컨디션이 좋은지 나보다 페이스가 빨랐다.
Laura는 멀어져 갔다. 오늘을 기점으로 그를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왓츠앱으로 고마움과 작별의 인사를 보낼까 하다가, 아직 일주일이 더 남았으니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단은 아쉬움을 마음 한 켠에 접어두었다.(하지만 이 순간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Laura의 마지막 뒷모습.
희한한 건물과 벤치가 있어 찍어보았다.
미드소마에 나올 것 같다.(;;)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10시 밖에 되지 않았다.
몬하르딘 마을의 입구.
알베르게 오픈 시간은 정오였다. 앞에 있는 벤치에서 쉬며 사진도 찍고 아점도 먹었다. 그러는 동안 지나쳐가는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탈리안 Angela, 미국인 Mike와 Christopher. 그들은 모두 로스아르코스로 간다고 했다. 여기서 멈추기로 한 결정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계획대로였다면 오늘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아침에 챙겨온 식재료로 아점을 해결했다.
이 조그만 마을에는 성당이 있어서 매 정각마다 종을 울린다.(심지어 새벽에도..) 종소리를 들으며 그늘에서 쉬는 순간이 평화롭고 좋았다.
두 시간을 기다리려니 조금 지루해졌다. 11시 반쯤 마을에 있는 유일한 바에 가서 맥주 한 잔을 마셨다.
12시가 되자 숙소 주인인 Ana가 나와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침대가 있는 곳은 2층이었다. 첫 번째 손님이었으니 원하는 침대를 아무거나 선택할 수 있었다. 햇볕이 잘 들고 뷰가 좋은 창문 옆 1층 침대를 골랐다.
지대가 높은 데다 2층이라 뷰가 멋졌다.
숙소는 깨끗하고 모든 것이 신식이었다. 화장실에는 유리로 된 샤워부스까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숙소에서 짐을 풀고 여유롭게 씻었다. 순례길에 와 처음으로 손발톱도 잘랐다.(TMI) 숙소에 나밖에 없으니 여유롭고 느긋하게 단장을 할 수 있었다.
할 일을 마치고.
뒤이어 들어온 사람들과 가볍게 스몰톡을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팜플로나에서부터 갖고 다니던 불닭볶음면을 끓여 먹었다. 일주일 만에 입과 몸이 클린해졌는지 너무 맵고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별로 맵지 않았는데.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이 정도 매운 맛을 즐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한걸까. 외국인의 입맛이 되어보니 새삼 충격이었다.
올라와 누워있는데 잠이 솔솔 와서 낮잠을 1시간 반이나 잤다. 더 자고 싶었지만 밤잠을 위해 일어나 움직였다.
처음으로 심한 허기를 느꼈다. 칼로리를 달라고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10km를 채 안 걷고 종일 먹기만 한 날인데도. 제대로 된 한 끼를 하고자 바에 가서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아직 식사시간이 아니니 7시에 오라고 했다. 작은 마켓에서 산 바나나와 사과 하나로 배고픔을 달랬다.(이럴 때마다 씨에스타가 너무 싫었다.ㅜㅜ)
7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다시 바를 갔다. 그런데 햄버거는 여전히 안되고 타파스만 시킬 수 있다고 했다.(하...)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왔다. 조용히 있고 싶어서 숙소의 커뮤니티 저녁식사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1층에서 풍기는 스테이크 냄새가 나를 괴롭게 했다. 인간 역시 동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간절할 땐 인간도 그저 본능에 충실해지는 한 마리 짐승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가지고 있던 크루아상 한 개와 견과류로 고픈 속을 달랬다. 내일은 반드시 든든하게 단백질을 먹고야 말겠다고 결심하며 잠을 청했다.
침대에서 보이는 야경.
이 무렵 조금 지쳐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부담스러워 조용한 곳만을 찾아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틀 전 파티 이후로 부족했던 잠이 원인이었다. 식사의 밸런스도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빵과 샐러드 위주로 먹다보니 지방과 단백질 섭취가 충분치 못했다. 매일 한 잔씩 마시던 맥주도 체력 회복에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라며 애써 아쉬움을 덮어두었지만 역시 인간의 촉은 무시할 수 없다. Laura를 더 이상은 볼 수 없을 것 같던 그날의 직감이 맞았다. 순례길에서의 아름다운 동행이 끝나던 순간은 떠올릴 때마다 아련해진다.돌아온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종종 그를 그리워한다. 언젠가 피렌체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손을 잡고 따뜻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다정한 인사를 나누며. 길 이후의 삶은 어땠는지, 행복을 찾아가는 인생의 여정은 순조로웠는지. 못 본 새 차곡차곡 쌓인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소중하게 주고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