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미술관에 가 작품을 바라본다. 작가와, 평론가와, 큐레이터가 인정한 가치 있는 작품을 응시한다.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이 자신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바라본다. 미술관의 적막 속에서 오로지 나와 작품만이 존재한다.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시도한다. 새침한 그림은 나에게 답변하기는커녕 질문만을 반복한다. 그러한 물음표가 나에게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너에게 달렸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작품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작가가 원하는 만큼의 자신의 생애가, 작품이 발휘하고 싶은 만큼의 생동감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의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창작자는 드러내고 싶은 만큼만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을 수 있는데, 관람자인 나는 왜 이것을 조절하기 어려울까. 아니, 어쩌면 작가도 같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조절하려 해도 넘치는 정념을 막기란 어려운 법이니. 어쩌면 예술이야말로 ‘적절한 거리두기’가 지켜지지 않아도 괜찮은 유일한 창구일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개인과 사회 간의 적절한 거리두기는 필수적이지만, 창작자-작품-수용자라는 특수한 관계 속 인간과 예술은 어떠한 제약과 해악 없이 마주한다. 무한한 상상력과 사유의 기쁨으로 가득한 관계에서 인간은 삶 앞에 선 단독자처럼 예술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건네며 소통한다.
왜 우리는 예술 앞에서 발가벗겨지는가. 벅찬 웃음과 불쾌한 미소,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방황하는 눈동자, 반짝이는 호기심과 공허한 무지를 감출 수 없다. 무엇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작품과 마주한 우리는 예술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예술은 광활한 지적 탐구의 세계, 광폭한 문명과 이기, 다양하고 따뜻한 인간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삶, 인간 내부의 심연, 반복되는 일상 속 소중함 등을 드러내 보여준다. 예술은 그 자체로 인간의 삶과 세계 전체를 개선하지는 못 할 것이다(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모든 예술이 그러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삶을 지속하고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한 자락의 선율이,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가, 한 폭의 회화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며 그러므로 예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값진 것이라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이렇게 예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사랑한다’는 것에도 역시 확신이 들지 않는다). 작품과 함께 하는 대부분의 시간에서 나는 필사의 노력으로 혼란한 뇌를 어떻게든 챙겨 가려한다. 실패한 경우에는 멍한 눈으로 그저 전시장을 산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왜 이리 미술은 어려운지 계속해서 전시를 보러 다녀도, 미술사와 미학을 공부해보아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전 전시 관람을 통해 알게 된 작가가 언급되거나, 작가의 작품이 함께 걸려 있는 날에는 왠지 모를 반가움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나에게 백남준, 곽인식, 김환기, 이불, 천경자가 그러했다. 미술이란 무엇인지,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잘 만든 작품’이란 무엇인지, 내가 어떤 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기에 계속해서 예술 작품을 본다. 그 아무리 멍한 눈과 혼란스러운 머릿속일지라도 예술과 가까이 지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