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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Aug 20. 2023

텍스트를 신고 뚜벅뚜벅

작품과의 일대일 만남은 가능할까? 작품 외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채 작품과 나 단둘이 만나는 것 말이다. 만약 눈앞에 어떤 맥락도 없이 작품을 들이민다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역시 예술은 어렵다’라는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와 예술 간 거리를 좁혀주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텍스트’이다. 예술 감상에 있어 텍스트의 가교 역할이 일상적이라면, 우리는 작품을 ‘보는 것’일까, ‘읽는 것’일까?     


사실 보는 것이든 읽는 것이든 그리 중요하진 않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보기도 하고 읽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특히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로 논의되어 왔다. 우리는 그것들이 서로 배타적인 속성과 영역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봐야 하는 대상인 이미지는 동시성과 유연성을, 읽어야 하는 대상인 텍스트는 기호성과 불연속성을 가진다고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함께하는 경우,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보조하는 주종 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미지도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로서 지위를 가지고, 텍스트도 그것의 구성을 통해 감각적 자극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이미지가 ‘감각’에 더하여 ‘해석’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상 이미지와 텍스트는 더이상 부여되었던 기존 속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이뤄낸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인 것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아니다. 예술 작품과 텍스트의 관계이다. 본문에서는 이미지와 성격이 비슷한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감상 및 해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예술을 통틀어 ‘예술 작품’이라 칭하려 한다. (예술이 아닌 텍스트와 예술인 문학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참고하여 ‘예술 작품’과 ‘작품 곁의 텍스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미지가 해석의 대상이 되었듯이 예술 역시 감각의 전유물에서 해석의 대상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더욱 복잡해진 예술은 유희에 머물지 않고 무언가를 읽어내도록 요구한다. 그러니 우리가 현대 예술 앞에서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술은 재현하기를 거부하고, 음악은 조화로운 선율을 벗어났고, 심지어 문학마저도 무슨 말인지 읽히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작품이 기껍게 만나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중매가 필요해 보인다.     


예술 작품과 관련된 텍스트는 ① 제목, ② 설명글, ③ 평론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세 가지 중 가장 성격이 다른 것은 바로 제목이다. 작품 내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제목은 예술 작품과 가장 밀접한 텍스트이지만 작품 곁(바깥)의 텍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는 전적으로 작가가 의미를 창작하는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이 제공하는 유일한 텍스트라는 이유로 제목의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 제목은 작가가 감상자에게 보내는 암호화된 러브레터 혹은 설명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작가의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진지하게 숙고하는 성실함을 기대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수용된다. 이는 작품이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의 의도 역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롤랑 바르트는 ‘정박’이라는 단어로, 이미지의 여러 의미 중 일부를 선별하여 의미를 한정하는 텍스트의 기능을 언급하였다(『이미지와 글쓰기』). 이미지를 예술 작품으로 확대하여 생각해 보자. 글로 표현되기 이전 작품은 오직 그 자체로서 다양한 의미 가능성을 품는다. 그러나 텍스트가 말을 얹기 시작하는 순간, 작품의 의미가 특정하게 좁혀진다. 심지어 텍스트는 감상자가 작품을 특정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특히 ②의 텍스트 - 작가 및 전시 소개글, 인터뷰, 도슨트 원고, 언론 홍보 글 등 - 은 정보 전달을 목표로 가장 중립적이고 정석적으로 여겨지는 설명을 제공한다. 특정한 의미를 강요하지 않도록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동시에, 막막한 우리에게 작품으로 가는 길을 특정 의미로써 안내한다. 후자의 기능은 수많은 의미를 가진 작품을 작가의 작품관, 예술사적 위치 등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의미를 한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작품 앞에서 막막한 우리에게 관람 포인트를 친절히 나열해 주는 것이다.      


이는 ③의 권위자의 평론, 관람객의 감상문과도 이어진다. 여기서는 당연하게도 더욱 깊숙이, 자의적인 의미 선별이 이루어진다. 구태여 객관성을 내세울 필요도 없기에 개인의 시선으로 견지한 내용이 솔직하게 담기는 것이다. 한편 평론과 감상문은 ①처럼 예술 작품에 포함되거나 ②처럼 작품을 보조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상자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작품 밖에 위치하는 텍스트이다. 따라서 개인의 감상과 생각을 옮긴 글은 작품 안의 다양한 의미 가능성을 해방하고, 작품 곁에서 더 많은 의미를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은 명명하기 힘든 요소를 지니고, 그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의미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것이 언어로 예술 작품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텍스트로 풀어쓸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술 작품과 텍스트 간 침범할 수 없는 각자의 영역이 존재한다. 설명글은 작품을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고, 감상은 그것을 쓴 이에게 귀속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곁의 텍스트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는 작품이 잘 읽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을 소화하도록 도와준다. 작품의 연장선인 제목, 정보를 제공하는 글, 관람객의 후기는 모두 무한한 해석 가능성 속에서 의미를 선택하여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텍스트가 단지 예술을 받쳐주는 조연 역할에 머무는 것 역시 아니다. 제목에서 작가에 의해 의미가 창작되고, 설명글에서 의미가 구체화되고, 평론에서 의미가 확장된다. 예술의 곁에서 텍스트 역시 풍부해지는 것이다. 예술과 텍스트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세계를 넓혀간다.     


진부한 말이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읽으면 된다. 보이되 읽히지 않으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원한다면 배경지식을 찾아 읽을 수도 있고, 비평가의 해석을 수용할 수도 있고,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무렴 모두 좋은 향유 방식이라 생각한다. 작품을 만나는 것은 오롯한 주체인 감상자이다. 원하는 방식대로 예술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면 된다. 예술은 우리의 자유로운 해석과 함께 발맞춰 의미의 세상을 다채롭게 물들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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