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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May 02. 2024

미친 여자 사랑하기

매들린 밀러 『키르케』

며칠 전, 하이브의 자회사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가 진행한 기자회견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대중들 앞에 나타난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비속어를 섞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가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는지보다 ‘미친 여자’와 같은 그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폭주하듯 말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래도 저건 아니지’, ‘너무 감정적으로 구는 거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대표라는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안 되는가? 그리고 그는 정말 ‘미친 여자’가 맞는가?     


나는 여기서 민희진 대표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은 게 아니다. 감정에 호소하여 정동을 움직이는 것이 의도된 전략이었는지를 따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보인 ‘미친 여자’의 이미지에 대해 사람들이 얹는 이런저런 반응에 관한 것이다.     


이 ‘미친 여자’에는 정말 미친 여자도,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지만 세상이 미쳤다고 프레임을 씌우는 여자도 모두 포함된다. 물론 이 ‘미쳤다’의 기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미친 여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 있다. 산발 머리를 하고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횡설수설하다가 악을 쓰다가 울기까지 하는 여자. 같은 모습의 미친 남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 오래된 이분법이 있다.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 민희진 대표가 기자회견장에서 보인 모습은 이 오래된 편견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습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백 번 참다가 한 번 터진 분노에는 ‘역시 여자들은 감정적이다’라는 편견이 덧씌워진다. 미친 여자의 모습은 조롱거리가 된다. 세상은 분노하는 여성에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우아하게 행동하라 말한다. 그가 미칠 수밖에, 미친 것처럼 보이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모두 지워지고 ‘미친 여자’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그가 정말 미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친 여자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미쳤다는 낙인이 중요하다.


미친 여자를 배척하는 분위기에는 여성에 대한 유구한 혐오, 심지어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여성은 언제나 비탄하는 존재, 감정에 휩싸여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존재로 등장했다. 그리고 남성인 주인공에게는 ‘그렇게 여자처럼 굴지 마시오’, ‘여자의 유혹 때문에 이성을 잃지 마시오’라는 경고가 주어졌다. ‘여성스러운’ 감정은 ‘남성스러운’ 이성의 통제 대상이었다. 미친 여자를 판별하고 단죄하려는 것은 마녀사냥을 닮아 있다. 마녀사냥은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치료를 제공하던 여성,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은 비혼의 여성처럼 ‘통제되지 않은’ 여성을 마녀로 몰아 처형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파토스적인 존재라는 멸시,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질투, 약초로 병을 치료하는 신비로움 등은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려움은 마녀라는 피상적인 이미지를 낳았다. 악랄하고, 이기적이고, 질투심에 눈이 멀고,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해 원하는 바를 탈취하는 ‘여자.’ 납작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다. 세상은 여성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이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은 ‘성녀’ 또는 ‘창녀’ 또는 ‘미친 여자’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5월의 소설로 『키르케』를 소개하려고 한다. 매들린 밀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키르케를 새롭게 재해석한다.     


서양 문학에 최초로 등장하는 마녀인 키르케는 태양신 헬리스와 님프 페르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마녀로서 유혹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키르케가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살펴보자.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고국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키르케가 사는 아이아이에 섬에 정박한다.     

   

그녀는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등받이의자와 안락의자에 앉히고 그들을 위해 치즈와 보릿가루와 노란 꿀과 프람네 산 포도주를 함께 섞어 저으며 여기에 해로운 약도 탔으니, 그들이 고향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었소. 내 전우들이 그녀가 준 것을 다 받아 마시자마자 그녀는 즉시 그들을 지팡이로 툭툭 쳐서 돼지우리에 가두었소. 그리하여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목소리와 털과 생김새를 갖게 되었으나 분별력만은 여전하여 전과 다름없었소. 그들은 그렇게 울면서 갇혔고 키르케는 그들에게 땅바닥에서 뒹굴기 좋아하는 돼지의 양식인 상수리와 도토리와 층층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던져주었소. _『오뒷세이아』, 247쪽.     


아이아이에 섬에 사는 키르케는 섬을 찾아오는 남성들을 아름다움으로 유혹한 뒤 그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돼지로 변해버린 전우들과 달리 오디세우스는 에우륄로코스의 도움을 받아 키르케의 계략에서 벗어난다. 마법이 통하지 않자 키르케는 오디세우스를 성적으로 유혹한다. (‘우리 둘이서 침상에 올라 사랑의 동침을 해요. 서로 믿을 수 있도록.’) 오디세우스는 돼지가 된 전우들을 인간으로 바꿔주는 것을 조건으로 동침을 한다. 요컨대 『오뒷세이아』에서 키르케는 남성을 유혹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마법에 능통한 마녀이다.     


한편, 매들린 밀러는 원작의 이야기(키르케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님프 스킬라를 흉측한 괴물로 만든 것, 섬에 방문한 사람들을 짐승으로 만든 것, 오디세우스가 섬에 머문 것)를 모두 담아내는 동시에 키르케라는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다. 『키르케』에서 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가서 인간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고, 헤르메스로부터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등 호기심을 지닌 여성으로 나온다. 한순간의 질투심에 스킬라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도 한다. 마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견제를 받아 아이아이에 섬에 유배를 가지만 그곳에서 진정한 자유를 맛보기도 한다. 악랄하고 위험한 ‘마녀’가 인간적인 삶의 맥락과 멋진 마력을 가진 여성이 된 것이다.     


『오뒷세이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키르케가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성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마녀라는 점이다. 이는 중세 마녀사냥에서 여성들에게 ‘악마와 교미를 한’ 혐의를 뒤집어 씌웠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혼을 통해 남성에게 종속된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발휘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향유하다가 나락에 떨어지는 남성 자신들에 대한 불안감이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에서 키르케는 오히려 섬에 홀로 사는 여성의 취약성을 가지고(우연히 섬에 당도한 인간들은 키르케가 마녀인지 모르기에 그를 범하려 한다), 따라서 마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온다. 강간에 대한 징벌이자 보복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키르케』는 ‘마녀’가 가지는 피상적인 이미지와 여성 혐오적인 시선을 뒤집고 키르케에게 유기적인 서사를 부여한다. 오디세우스의 영웅담에서 그의 고난을 발생시키는 수단으로 등장한 ‘마녀’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조망한다.     


아니, 나는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지. 나는 발각됐어. 그들에게 내 실체를 보여주자. 세상에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해주자. _『키르케』, 248쪽.     


대개 ‘미친 여자’는 서사가 없을 때 탄생한다.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때 그는 ‘이상한 여자’, ‘미친 여자’, ‘정신병 있는 여자’로 여겨진다. 특히 감정적으로 굴 때 미친 여자의 전형이 된다. 미친 여자의 프레임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 사람들은 키르케가 질투에 눈이 멀어 다른 여성을 괴물로 만들 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바라보고, 남성들을 성적으로 유인하려 할 때 ‘여자의 간교한 꾀’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바라보고, 자신이 유혹해 놓고 남성들을 짐승으로 바꿔버릴 때 ‘나쁜 년’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바라본다. 키르케는 그렇게 악녀이자 마녀가 된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뤄져 왔다. 사람들은 여성의 ‘진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입맛에 맞지 않은 여성을 ‘미친 여자’라 명명하며 손쉽게 다뤄왔다.     


그러나 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순간 우리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왜 그가 마법을 통해 남성들을 짐승으로 바꿔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는 순간 키르케는 입체적이고 공감 가능한 인물이 된다.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도 그러하다. 처음에 사람들은 ‘왜 저렇게 감정적으로 굴지’라며 반감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연유가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친 여자’였다가 ‘그럴 수밖에 없던 사람’이 되었다. 서사가 부여되는 순간, 미친 여자는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매력적인 대상이 된다. 따라서 남성들의 서사 속에서 납작하게 묘사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것이 의의를 가진다. 타자화된 여성을 주체로 바로 서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친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만들어져야 한다. 더 가시화되어야 한다. 그들이 더 이상 미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론 진짜로 (부정적인 의미로) ‘미친 여자’도 있다. 야비하고 몰염치한 여자들도 많다. 그것을 부정하면서 그저 여성을 칭송하려는 것이 아니다. 규범에서 벗어난 여자들에게 더 다양한 언표가 허용되지 않은 채 ‘미친 여자’라는 명명만 이루어지는 것이 불만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친 여자’는 악독하기만 하고 정신병을 가진 여자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순종적이지 않아 ‘여성스럽지 않은’, 감정적이어서 ‘여성스러운’ 여성 모두에게 붙는 말이다. 많은 경우 ‘미친 여자들’은 미치지 않았다. 미쳤다는 프레임이 그들에게 덧씌워졌을 뿐이다. 능력 있는 남자는 대단한 사람이지만 능력 있는 여자는 ‘독한년’, ‘미친 여자’가 되는 기울어진 세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여성들에게 더 다양한 수식어가 허용되어야 한다. 나는 야망 있는 여자, 악랄한 여자, 분노하는 여자, 애도하는 여자, 아니꼬운 여자, 이기적인 여자, 비윤리적인 여자가 더 많이 보이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설령 미쳤으면 뭐 어떤가. 어차피 미친 세상, 제정신으로 살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나는 다만 미친 여자가 미친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나는 더 다양하게 미친 여자들을 원한다.           


나는 미친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이 세상에 만드는 균열을 사랑한다. 미친 여자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미친 생각을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미친 여자들은 멋지다. 자신으로 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싸울 줄 아는 모습이 굉장히 멋지다. 그들은 절대 지지 않는다. 순응할 바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를 선택한다.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미친 여자는 기어코 세상을 뒤집는다. 터키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지혜로운 여인이 다리를 발견했을 때쯤 정신 나간 여인은 이미 강 건너편에 있었다.’ 강 건너편에 먼저 가서 지혜로운 여인을 반길 줄 아는 미친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자료

매들린 밀러, 『키르케』, 이은선 역, 이봄, 2020.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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