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이산 신체 재회>
여자는 삿대질을 한다. 여자들은 삿대질을 한다. 검지손가락을 전방을 향해 가리키며 삿대질을 한다. 삿대질을 하다가 고개를 젓다가 손바닥을 비비며 애원을 한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신음이 새어 나온다. 비명이 공간을 가른다. 맹렬히 삿대질을 하던 몸이 쓰러진다. 바닥을 긴다. 몸과 몸이 얽힌다. 한데 엉킨 몸들이 꿈틀거린다. 부둥켜안은 것 같기도, 끈적하게 들러붙은 것 같기도 하다. 삿대질을 하고 고개를 젓는 여자들과, 꿈틀거리며 몸을 얽고 있는 여자들과, 바닥에 널브러진 여자들.
_이 작품은 이미지에서 시작한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신체 이미지, 여기서 논의를 출발해 보자. 미디어는 특정 장면을 포착하여 사람들에게 이미지로 전달해 보인다. 미디어가 대상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인식이 변한다는 점에서 보도 대상과 수용자 사이를 연결하는 미디어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렇다면 미디어가 여성의 신체를 재현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들 앞에 선 여성은 미디어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악을 쓰며 울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다. 미디어가 비극 앞에서 분노하고 오열하는 여성의 이미지만을 반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대상의 구체적인 서사를 지운 채 여성을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그려낸다.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의 맥락을 가졌으며, 어떤 사안에 대해, 왜 분노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미디어 배포 과정에서 그것들은 모두 소거된다. 수용자인 우리 눈앞에 전달되어 보이는 것은 울면서 화내는 여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미디어는 삶의 맥락에서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분리하고 그 일면만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미지 너머의 실제 삶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곳에는 사람이 아니라 대상화된 이미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조영주 작가는 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바탕으로 피상적인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퍼포먼스를 구성한다. 여성 5인으로 구성된 퍼포머들은 감정적으로 격앙된 채 삿대질을 하고 고개를 젓는 등 특정 행위를 반복한다. 퍼포먼스는 일말의 서사마저 완전히 배제하고 ‘분노하는 여성의 신체 이미지’만을 가져온다. 우리는 퍼포먼스 속 여성들이 왜 삿대질을 하는지, 왜 고개를 젓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화면 앞에 서서 여성들의 맹렬한 행위를 몸으로 겪어낼 따름이다. 조영주 작가는 오열하는 여성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더욱 극대화하여 전달함으로써 기이함을 느끼게 만든다. 하나의 동작에 온 정신이 매몰된 여성의 광적인 모습은 관람객을 관람객으로 하여금 뒷걸음치게 만든다.
_이미지에서 몸으로
한편 이 작품의 끝은 몸이다. 조영주 작가는 몸으로 나아간다. 이미지를 활용한 비판의식 촉발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미디어의 재현에서 포섭되지 않은 여성의 실존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만약 극단화에 목적을 두었다면 반복적인 행위를 매끈하게 편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격노하는 행위 속에서 지치고 쓰러지는 여성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낸다. 그의 퍼포먼스에는 서사는 없지만 ‘지속되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지쳐가는 여성들의 몸’이 있다. 반복되는 격정적인 행위 속에서 숨이 거칠어지고 땀에 옷이 젖어간다. 그리고 퍼포먼스 속에서 여성들은 서로 기대고, 껴안고, 매달리고, 때로는 반목한다. 그들의 얽히는 몸과 거친 호흡은 화면 너머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조영주 작가는 과격한 행위뿐만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을 생생하게 포착함으로써 인간의 현존은 미디어의 파편적이고 일면적인 재현에 결코 포섭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미디어에 채 포착되지 않는 현존의 문제는 퍼포먼스가 이뤄지는 공간과 이원생중계라는 매체의 특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공간은, 한 공간에서의 퍼포먼스가 다른 공간의 화면으로 생중계되면서 화면 안에 다른 화면이, 그 안에 또 다른 화면이 배치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따라 하나의 화면에 퍼포머들의 신체 이미지가 어지럽게 겹쳐진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모든 이미지를 볼 수 없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 이곳에서 저곳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순간 시선에서 누락되는 것들이 있다. 조영주 작가는 중첩되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없다’는 한계를 자각하는 경험을 촉발한다. 반면, 우리가 퍼포먼스 영상을 통해 느끼는 퍼포머들의 현존은 언제나 연속적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실존과 부분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어긋남이 발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률적으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의 틈 사이로 누락되는 현존을 감각하게 된다.
_몸으로 다시 만나기
조영주 작가는 미디어에서는 특정 신체 이미지만이 반복적으로 생산되지만 그것에는 결코 여성의 실존 자체가 담기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신체들의 꿈틀거리는 움직임, 거칠어지는 호흡, 끈적한 땀을 통해 여성들의 실제 신체를 보여준다. 그는 미디어에서 재현되지 못한 배제된 실존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이것이 바로 조영주의 작품 세계가 가진 아름다움이다. <이산 신체 해후>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여성이 만나 눈을 맞추고 <이산 신체 재회>에서는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절망하는 여성들이 서로 몸을 부대낀다. 그의 작품에는 신체의 맞물림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실존을 감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오롯한 몸으로 존재한다.
미디어가 공급하는 이미지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살아있는 존재를 보는 일은 우리에게 충격과 동시에 용기를 준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공간은 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 너머의 실제 세계이기 때문이다. 대상화되어 납작해진 이미지 너머에서 서로 다른 몸들은 다시 만나야 한다. 아니, 서로 다른 몸들은 만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우리가 함께 몸을 얽을 수 있기를, 당신을 만지고 보듬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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