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라는 연료가 몰입이라는 엔진을 태워버리는 역설에 대하여
풀려는 문제가 어려울수록, 그 문제를 푸는 명확한 방법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스타트업이란 본질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까지 개척해야하는 논술시험과 같다.
알수없는 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선택을 해야 하는 그 시점에,
각자의 경험과 직관, 그리고 알고 있는 역사적 기록들을 나침반 삼아,
가장 맞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발을 떼는 것.
그다음은 버티는 시간이다.
내가 한 그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기 위해, 그 믿음을 현실로 길어 올리기 위해,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지속하는 것.
때로는 그 믿음을 수정하는 과감함을 수용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일 것이다.
물론 잔인한 진실이 있다.
아무리 좋은 선택을 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때(운)'가 오지 않으면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끝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며 하루를 견디고 있는 모든 창업가와 동료들에게 깊은 찬사와 응원을 보낸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견디고 서 있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이미 숭고하다.
그렇다면 결과조차 알 수 없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아니,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올바른 걸까?
최근 읽은 조남호 저 《공허의 시대》와 고명환 저 《고전이 답했다》 에서는 공통적으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몰입”을 이야기한다.
특히 《공허의 시대》는 몰입을 "개인의 정신과 삶을 충만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 이라고 하며, KPI 이든 목표 따위의 말은 끊임없이 갈증을 불러일으킨다고 까지 한다.
난 '몰입'이 스타트업에게 단순한 집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고 있는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즐김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닌.)
나의 120%를 쏟고 있는 상태.
그래서 나만의 길을 만들 수 있는 진정한 동력.
이런 몰입이란 녀석은 스타트업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난 다음 세 가지를 몰입의 조건으로 꼽는다.
- 난 매우 평범한 인간이므로, 다른 사람들도 몰입의 조건은 별반 다르지 않을것이다.
1. 자율성 :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야 한다.
2. 가치효능감 : 나의 행위가 가치를 인정받아(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껴야 한다.
3. 환경의 단순화 : 신경을 분산시키는 다른 무언가가 없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우리는 결과와 상관없이 문제 해결 과정 그 자체에서 충만함을 느끼고 (조남호님의 정의를 빌려) 계속해서 몰입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타트업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투자 유치' 가 바로 이 몰입의 세 가지 조건을 구조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많은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은 직후 길을 잃고 무너지는 이유, 나는 그것을 '몰입의 상실'에서 찾았다.
: 몰입 조건의 파괴
[대표자의 시선] 꿈꾸는 자에서 '고용된 대리인'으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외부자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구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핸들이 내 손을 떠나 투자자의 회수 시점이나 성장 지표를 향해 꺾이는 순간, 창업가에게 사업은 '나의 꿈'이 아닌 '주주의 숙제'가 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서, 뇌의 몰입 스위치는 켜지지 않는다.
[팀원의 시선] 동료에서 '부속품'으로
팀원들은 대표의 비전에 공감해서 합류한다. 하지만 투자가 들어오면 회사의 우선순위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서 '투자자에게 보여줘야 하는 일'로 바뀌게 된다. 팀원들은 더 이상 회사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온(Top-down) 납득할 수 없는 KPI를 달성해야 하는 부속품이 될 때, 그들은 일에 대한 애정을 거두기 시작한다.
[대표자의 시선] 가짜 성장에 대한 불안
한국의 투자 시장은 '생존'을 인질로 '매출'을 요구한다. 대표는 제품의 본질적 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점점 더 당장 다음 라운드 투자를 위한 그래프를 만드는 데 주위를 뺃기게 된다. 마음 한구석에는 "이건 진짜 성장이 아닐 수 있는데"라는 본질적인 질문도, 숫자를 증명하지 못하면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구조 속에서 자존감은 숫자에 종속된다.
[팀원의 시선] 과정과 존재가치의 상실
백엔드에서 작성되는 안정적인 코드, 일을 하는 방식을 잡아주는 시스템, 디자이너가 고민한 사용자 경험(UX)은 재무제표에 '매출'로 즉시 환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치 절하된다. "지금 돈 안 되는 거 할 시간 없어요"라는 말 앞에서, 팀원들이 밤새워 쏟은 노력과 과정의 가치는 부정당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
[대표자의 시선] 본질을 놓친 '설득의 시간'
문제를 해결하려면 깊은 사색과 집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투자는 대표를 회의실로 내몬다. IR 자료 작성, 이사회 보고, 자금 집행 소명 등 '일하기 위한 일'이 대표의 시간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제품과 팀을 들여다봐야 할 에너지가 외부인을 설득하는 데 소모될 때, 조직의 구심점은 흐트러진다.
[팀원의 시선] 맥락이 끊긴 '채찍질의 시간'
"대표님, 지난달엔 A가 중요하다면서요?" 투자가 요구하는 속도전은 잦은 피벗(Pivot)을 낳을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의 기능을 깊이 있게 완성할 물리적 시간은 주어지지 않고, 당장의 성과를 위한 임기응변식 업무가 쏟아진다. '왜'해야 하는지 이해할 틈도 없이 '빨리' 해내야만 하는 환경. 생각할 시간이 없는 곳에서 혁신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불편한 딜레마와 마주한다.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은 구성원들의 압도적인 '몰입'에서 높아지지만, 정작 성장을 위해 선택한 투자가 그 몰입을 방해하는 구조를 만들어 오히려 성공 확률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고 투자를 받지 않을 수도 없다.
성장을 위해 자본은 필수불가결한 연료이며, 자생적인 수익 구조를 갖추기 전까지 투자 시장에 기대야 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생존 공식이기 때문이다.
몰입은 지켜야 하고, 자본은 구해야 하는 이 상황.
틀리지 않는 두 가지 명제가 교차되는 딜레마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는 게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어려움 이라면,
우리가 마주한 상황이 정확히 그렇다.
내 가설이 맞다면, 이제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 외부의 자본을 유치하면서도 어떻게 내부의 자율성을 지켜낼 것인가?
- 숫자로 증명해야 하는 압박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만의 고유한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인가?
- 쏟아지는 환경의 소음 속에서 어떻게 다시 깊은 몰입의 공간을 확보할 것인가?
투자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투자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들어온 자본이 우리의 영혼(몰입)을 잠식하지 않도록 '자본과 몰입의 공존'을 설계하는 일일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받아들인 또 다른 어려운문제.
나는, (또는 당신은)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