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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Dec 14. 2024

런던 빅벤을 향해 달리다

어느 여행자의 로망


놀라운 사실이 있다. 런던에 온 지 5일째인데 아직까지 ‘빅벤’을 영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빅벤이 런던에서 어떤 존재인가? 기념품 자석에 빠지지 않고 새겨지는 대표 랜드마크가 아니던가. 그럼 나에게는 어떤 존재인가? 만약 내게 런던에서의 1시간이 주어진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빅벤으로 달려갈 정도로 갈망한 시계탑이 아니던가. 어느덧 여행은 중반을 지나고 있었고, 나는 살짝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아껴뒀을 뿐이다. 급식에 나오는 돈가스나 소시지처럼. 나머지 반찬들을 먼저 먹고,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온전히 즐기고자 남겨둔 것이다. 얼렁뚱땅 스치듯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탕수육처럼 소스에 살짝 찍어먹는 듯한 그런 만남은 지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늦어진 것뿐이다. 제대로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만날 때가 된 것 같다.


‘내일은 꼭 빅벤을 보고야 말겠어!’

짧은 다짐을 하고 이내 잠들었다.






또 새벽에 눈이 떠졌다.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한 신체 리듬이 다시 깨졌나 보다. 하아… 망할 놈의 시차. 나도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고, 밤중에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둔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예민한 어른이 된 건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른 아침에만 할 수 있는 걸 하자. 아침 조깅을 하는 거야!


여행 중에 하는 조깅은 소소하지만 특별하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낯선 장소에서, 너무나도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츄리닝 위에 코트를 입었는데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이랄까. 이런 생소한 조합은 나 같은 여행자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캐리어 밑바닥에 깔려있던 운동복을 꺼냈다. 이걸 입을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시차부적응으로 새나라의 어른이가 되어버린 덕분에(?) 챙겨 온 정성이 헛수고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런 짐도 없는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 밖을 나서니, 마치 내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실거주자가 된 것 같다. 아직 달리기는 시작도 하기 전인데 벌써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마도 설레기 시작한 것 같다.






바람막이에 달린 지퍼를 끝까지 잠갔지만 차가운 공기는 몸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뛰기 시작하면 온몸에 열기가 오를 테니까. 추위는 아주 잠시 뿐이다. 숙소에서 빅벤까지는 도보로 50분. 살짝 빠르게 뛰면 30분 안에 도착 가능하다. 왕복 1시간? 아침 운동으로 딱 적당하네!


너무 이른 시간에 나온 탓일까. 거리에 나와 같은 조깅좌는커녕 누워있는 노숙자뿐이었다. 살짝 겁을 먹긴 했지만, 여차하면 전속력으로 달릴 각오로 그들을 지나쳤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자 내 앞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빅벤이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웅장하게.



아침 조깅을 하며 마주한 빅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인가.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빅벤은 태양의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환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천국에 성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밤에 보는 빅벤보다 지금의 빅벤이 더 아름다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중에 야경을 봤지만 역시나 아침의 시계탑이 더 좋았다.)


나도 모르게 내적 탄성이 터졌다.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온갖 호들갑을 떨었을지 모른다. 넘치는 흥분을 스스로 감당하자니 벅차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작고 귀여운 것에만 반응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이 이렇게 크고 빛나는 것에도 요동치다니. 오늘도 새로운 나를 마주한다.


조조영화를 예매했을 때, 간혹 운이 좋으면 아무도 없는 상영관을 누리곤 한다. 지금이 그렇다. 웅장한 시계탑을 나 혼자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렇게나 한적하고 고요한 빅벤이라니. 낮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림이다. 아마 몇 시간 뒤면, 사방에서 온 관광객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상인들이 만나는, 엄청나게 기 빨리는 광장이 될 것이다.







구글맵으로 따라가는 정신없는 관광은 금방 휘발되고 만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연신 셔터를 눌러대지만, 결국 그 마저도 나중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장면은 기록으로 남았을지 몰라도, 그 모습을 담던 순간의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걷고 달리며 관찰한 여행지의 모습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그때 내가 느낀 감정까지 전부.


나는 빅벤 앞을 달리던,

그날의 아침을 아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해가 뜨고있는 모습과 런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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