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신다면??

- Si, Dios quiere를 이해하는데 걸린 20년

by Naesu

다른 날과 똑같았다. 그저 평범한 하루 일과의 끝자락에 산토스에게 조심해서 가고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열대지방인 온두라스의 오후 5시경은 여전히 너무 뜨겁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Si, Dios quiere - 씨, 디오스 끼에레,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어 얼른 바쁜 척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마음이 바쁘게 헝클어지고 있었다. 딱 보통인 날에 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다음에 보자는 말을 하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산토스에게 내가 무슨 서운한 행동을 했거나 무례하게 굴었던가? 자가 진단을 한다. 산토스 표정을 되짚어 보아도 특별하지 않았다.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하는 것이 일상인데 왜 갑자기 하나님이 등장한 것일까? 하나님이 원하는 날에만 일하겠다는 것인지, 본인이 나오기 싫은데 하나님이 대신 그 말씀을 해 주고 계신다는 얘긴지, 이제 일 할 의지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산토스가 우리 집에 와서 일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생각할수록 생각의 실타래는 엉켜만 갔다. 그 말을 그때 처음 들었던 것인지, 이미 들었으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무튼 내 의식에 명료하게 '씨 디오스 끼에레'가 각인된 것은 그날, 산토스를 통해서였다.

복잡해진 나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산토스는 여전했다. 다음날도 충분히 일찍 나오고 집안일을 돌보아 주어 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별 일 없이 이어졌다. 가끔 '씨 디오스 끼에레'로 화답하여 내 맘에 번민을 주거나 설거지해 놓은 그릇에 밥풀이 붙어있는 것 같은 사소한 실수를 비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 외에는 대체로 무난했다. 무엇보다 믿을 수 있어 좋았다. 두 명의 어린아이를 맡기고 일하러 가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사람, 까탈스런 데 없이 무던하고 다정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한 번 명확해진 '씨 디오스 끼에레'는 점점 더 자주 내 귀를 괴롭혔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악해졌다. '하면 된다'를 국가적인 교훈으로 배우며 자란 나에게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두부를 만들기 위해서 하루 전부터 콩을 불려 놓고 틀까지 마련해 둔 마당에 갑자기 맷돌의 손잡이를 찾을 수 없게 된 그 망연함, 어이가 없었다. 온 집안을 다 뒤져서 맷돌 손잡이를 찾아내거나, 옆집에서 빌리거나 그도 아니면, 당장에 나무를 잘라서 깎아서 맷돌 손잡이를 만들어야 할 급박하고 절대적인 상황에 하나님 뜻으로 인하여 맷돌 손잡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최선의 노력을 시도해 보지도 않아도 좋을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려는 수작 같기도 했다. 실제로 이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산토스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니 나의 의심은 합리적이다.

비슷한 듯 하지만 살짝 결이 다른 'SI, Dios me permite -씨 디오스 메 페르미테-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이 표현은 큰 아이가 유치원 다닐 무렵 과외교사로 잠깐 있었던 줄리의 단골 어법이었다. 하이 텐션의 소유자인 줄리는 패션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잡지나 전단지 광고 모델을 하기도 하는 열정의 아이콘이었다. 옆에 있다가는 화상을 입을 것 같아 살며시 뒤로 물러나게 되는 젊고 예쁘고 활기가 심하게 넘치는 선생님이었다.

'씨 디오스 메 페르미테'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 그러니까 주로 자신의 계획을 말할 때 쓴다. 줄리의 얘기를 요약해보자면 이런 식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신다면 올해 나는 집을 살 것이고, 엄마와 여행을 갈 것이고, 미국에 있는 남자 친구와 곧 결혼을 할 것이다"

줄리는 생기가 넘치고 희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문장의 시작이거나 맨 마지막에 '씨 디오스 메 페르미테'를 붙였다. 자신의 계획이거나 희망 사항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대화의 절반에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다면'이 붙었던 것 같다.

실제로 줄리가 가정교사를 한 것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셔서인지 혹은 그녀가 나와 연락하기를 좋아해서 인지, 그녀와의 인연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녀는 집도 사고 여행도 했으나 미국에 있는 남자 친구와는 헤어졌고, 그 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결혼하였다가 이혼을 했다. 그 사이사이에 그녀가 직접 그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중미 생활이 햇수로 20년에 접어 들어서야 나는 대화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 가는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때부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누리던 일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당연함이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내가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얕은 수작 '게으름이나 부주의를 전능자의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하루가 주어지는 것은 '절대자의 보살핌'이 전제된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인 동시에 감사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오늘과 내일이 일상이 될 수 있게 하시는 지존자의 존재를 늘 인정하며, 지루할 수 있는 반복의 루틴을 설렘으로 채워가는 것이었다.

산토스는 우리 집에서 만 8년을 하루같이 일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그런데 우리 막내둥이 보다 두 살 많은 큰 손주부터 시작해서 지금 6명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어있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산토스는 가끔 내게 음성메시지로 안부를 전한다.

줄리는 화보 찍는 모델이자 선생님이었다가 봉사단체에 소속되어 일하고 아버지를 돕는 일을 어떤 때는 동시에, 어느 때에는 시차를 두고 하고 있다. 태생이 즐거운 그녀는 가르칠 때든 봉사할 때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1000%의 텐션으로 감당하고 있다.

난, 피상적인 형태로만 겨우 알게 되었던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는 말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되는 폭발적인 사건에 직면했다. 아니, 일련의 일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있는 중이다. 온두라스 생활은 계획보다 10년이나 빨리 끝나버렸다. 그리고 한국에서 글쓰기를 익혀간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의 속도로.


그리고 또 허락하신다면,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린 개인사의 빠르고 절망적인 전개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성숙을 소망하는 '50세의 성장기'를 글로 이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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