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게로 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중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존재는 날적부터 명명되어 있다. 저마다의 뜻이 있고 소망이 담겨있다. 이름을 지어주는 생명체는 인간 밖에 없다. 그런데 이 교만한 존재들은 자기의 이름만 짓는 게 아닌 다른 존재에게까지 이름을 부여한다. 함부로 고양이라, 강아지라, 의자라, 책상이라, 나무라, 풀이라, 해라, 달이라 부르고 다닌다.
과연 우리는 왜 이름을 짓는가? 그 권리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이것을 '사유'라 말하고 싶다. 받아들이는 과정. 그저 현상뿐인 세상을 나의 임의대로 해석하고 내면에 구축하는 과정이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각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관계없이 말이다. 내가 느끼는 빨간색이 진정한 빨간색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명도나 색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빨간색은 나의 내면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던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로서의 표상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의지로서의 표상은 인간 안에 사유한 세계 즉, 개인의 의지로 사유하는 세계가 본질이라 한다. 칸트가 말한 물자체(내면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아닌 사물의 본질)의 본질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가 아닌, 나의 마음속에 그려진 표상 그 자체가 본질이란 것이다.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제1 성찰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거대한 세계라 할지라도 내가 없다면 그것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전능한 기만자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속여 우주만물 중 단 하나도 진리가 없다 할지라도 내가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를 거짓이라 할 수는 없다 말한다.
나는 이것이 이름을 짓는 이유라 생각한다. 만물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외부의 세상을 내면으로 끌고 오는 것. 모든것에 중심에 ‘나’를 두고 세상을 개편하려는 움직임. 이는 교만한 인간의 월권이 아닌, 신이 자신을 닮은 첫아들에게 선물로 준 특권일 것이다.
이어령 교수는 인간을 “지혜를 가진 죽는 자”라고 정의했다. 신은 죽지 않고 동물은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르는데 오직 인간만이 신과 동물의 사이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는 존재란 것이다. 개인의 죽음은 죽음을 넘어서 작은 하나의 세계의 종말이 된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 존재를 명명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유한한 생명과 지혜를 동시에 가진 자로서 갖게 되는 사명이다.
인간이 각자가 사유하여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수십억 개의 세계가 있다. 우리는 이제 그 세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겠다.
마음속엔 길이 있다. 생각의 길, 마음의 길, 감정의 길이 있다. 그 길은 우리가 밟아서 다진 길이요, 진창길 위에 족적으로 새긴 흔적이다.
항상 듣던 습관대로 듣고, 품던 습관대로 감정을 품는다. 분노해 버릇하면 분노의 길이 나고, 우울해 버릇하면 우울의 길이 난다. 기뻐해 버릇하면 기쁨의 길이 나고, 사랑해 버릇하면 사랑의 길이 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 어떤 습관대로 사유했는가? 어떤 길을 냈는가? 흉물스러운 미움의 이름, 분노의 이름은 없는가?
나의 세상을 들여다봤다. 이런 글을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나의 내면을 아름답다 말하지 못하겠다. 열등감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 분노로 가시를 낸 엉겅퀴들. 마음의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욕심의 우상.
마음의 청소가 필요하다.
청소는 어렵지 않다. 선한 것을 마음의 중심부터 가득 채워 더러운 것을 마음의 바깥으로 밀어내면 될 것이다. 탁한 웅덩이에 맑은 비가 내려 그 물이 깨끗게 되듯 말이다.
이제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순전하게 사유하고자 한다. 편견 없는 순수함과 때 묻지 않은 호기심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처음 동물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그 이름을 지어줬을 아담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이름들을 지어줘야겠다. 사랑으로 바라보며 사랑의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어느새 마음에 온갖 예쁜 이름의 천지가 되어있길 바란다.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Ryuichi Sakamoto - ko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