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 회사들의 고객서비스 덕에 승질 급한 한인들의 분통이 폭파되고, 뚜껑이 실종되고, 목이 쏙 빠져버린 그런 이야기들. 주로 큰 소매 회사일 수록 전화 서비스에서 악명이 높다. 십 년을 훌쩍 넘게 살았으니 적응할 법도 한데...영 싫다. 그래서 어지간해선 고객서비스에 전화할 일을 만들지 않는다. 교환과 환불은 내 사전에 없다. 세상에서 제일 간단하다는 아마존 환불도 거의 하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안사고 만다. 일단 사면 주는 대로 먹고 쓰고, 불만은 꾹 삼킨다. 요즘엔 그나마 온라인 서비스가 꽤 다양하게 편리해져서 다행이다.
이도저도 안되면 얼토당토 않은 정신승리를 한다. 최근엔 문고리가 고장나서 최대한 같은 것으로 주문했는데, 결정적인 부품이 미묘하게 달라서 문에 나 있는 구멍과 맞지 않았다. 방이었다면 환기가 잘 되면 좋은 것이라고 치고 냅다 포기했을 테다. 문고리 없어도, 상시 열린 것이나 다름 없어도, 방의 한 구멍에 틀을 만들어 나무짝을 끼운 것을 문이 아닌 다른 것으로 부를 순 없지 않냐 하며. 아쉽게도(?) 그 문이 하필 차고와 집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지 않았다. 다행히 예전 문고리의 부품을 요령껏(이라 쓰고 어거지라 읽는다) 재활용했다. 이제 문에 알맞은 각도로 적당한 힘을 주면 닫힌 채로 있고, 애쓰면 잠글 수도 있게 됐다. 문이란 무엇인가.
지난 가을엔 세탁기 없이 석 달을 보냈다. 그 중 거진 한 달은 돌고 돌리는 고객센터와의 무한궤도 전화 상담으로 지났다. 하늘은 파랗고, 단풍은 예뻤고, 한시간씩 연결 대기하는 멜로디는 귀가 시리게 청명했다. 9월에 주문해서 진작에 억만금을 지불한 세탁기와 건조기의 안부는 설치해주기로 한 10월 중순까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무소식이 무섭다.
영겁의 시간 후에 연결된 본사 상담원은 백가지 질문을 해서 온갖 정보를 확인한 다음, 구입한 지점에 연락하라고 했다.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답을 해줄 수 있어 기쁜 것 같았다. 간신히 전화를 받은 지점의 직원은 매니저님이 자리를 잠시 비웠으니 나중에 혹은 내일 다시 하라고 했다. 자기한테는 절대 그 문제를 꺼내지도 말라는 의미다. 답답한 마음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 직원은 정말 유능하게 내 입을 막았다. 흡. 흡.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매니저님의 대응은 더 대단했다. 구구절절 얘기를 경청한 뒤, 정중하게 사과하고,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여 다음날 연락해주겠다고 했다. 드디어 귀인을 만났는가 하며 안도했으나, 감감 무소식.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인데...화도 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우리집엔 새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 애타게 기다리던, 한 시간 반 동안 판매 담당자와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함께 공부해가며 주문해내고야 말았던, 그토록 어렵게 내 돈을 가져가시라 하고 나니 최대치로 보람찬 마음이 들어 만나기도 전에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그 친구들이 아닐 따름이다.
그 친구들과 이별하고 새 친구들을 만나기까지의 여정에는 배송 지연, 설치 거부, 다소 험한 말, 재예약, 좌절, 주문 취소, 깊은 한숨, 부분 환불(!), 다른 업체에 상담 문의, 방문, 예약, 결제, 긴 기다림, 득도, 배송 재예약, 의심, 그리고 마침내 일어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는 자랑스런 K의 서비스로 흘러가야 마땅할 것이다. 현격하게 탁월한 나머지 쌀국의 무도함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열띤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건 대체로 맞다. 많은 빛나는 모먼트 중에 간단한 예를 들자니, 일년 반 넘게 검사 예약이 잡혀있다는 한 종합병원의 상담 직원분이 생각난다. 그 분은 종잡을 수 없이 어수선한 TMI(그러니까 제가요, 미국에 사는데요, 코로나 검사가 있을지도 모르긴 한데,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데, 초음파가, 피검사가, 근데 저는 괜찮은 걸까요...) 속에서 핵심만 파악해서, 검사 위치,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해서 진료에 필요한 우선순위를 정해서 다시 예약을 해주시고, 담당과에 추가 확인을 한 후에 내가 병원에 가기 전에 해야할 일과 마음의 준비까지 도와주셨다. 한 12분쯤 걸렸다. 그 분이 나의 가슴을 벅찬 감동으로 채우기까지.
긴 여운을 남긴 또 다른 통화가 있다.
(*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느낌만 살려서 쓴 것이므로 실제 대화와는 차이가 있다. 혹시 A카드 고객 응대 매뉴얼과 다르다면 다 내 책임이다.)
님: 정성을 다하는 A카드...어쩌고 저쩌고~~
나: 제가 어제 인천공항 편의점에서 물건을 샀는데, 카드 결제가 안되더라고요. 혹시 정지가 된 건지...(죄송하게도 한국에 살지 않아, 코로나라, 너무 오래 신용카드를 쓰지 않아서...구구절절 대기중)
님: 아니! 어떻게..... 고객님. 바로 정지 해제 해드렸습니다.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나: 어(놀람을 숨기고)...카드 한도가 낮춰질 거라는 이메일을 받긴 했는데...(역시 말 다 안끝남)
님: 그럼 안돼죠!! 이전 최대 한도로 높여놨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으신가요?
나: 아...
빠르다. 정말 빠르다. 아니다, 이건 빠르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통화로 인한 나의 반응 또한 유능함에 감탄했다거나, 친절함에 감동했다거나 하는 익숙한 느낌이 아니었다. 신선한 청량함이 불꽃처럼 터졌다. 팡. 팡. 그 새로움은...말하자면 전지적 고객님 시점에서 우러나온 선제적 빡침이었다.
이 상담원은 영문을 몰라 조심스러운 나를 대신해서 미리 이 개명천지에 도대체 카드가 정지되고 한도가 축소되는 일이 도대체 있을 수가 있는 일이냐는 듯 화를 내주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응당 내가 황당하고 짜증이 났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기가 막히고, 우리카드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버젓이 저지르고도 내가 전화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빡친 것 같았다. 자기가 일하고 있는 회사이지만, 비록 자기가 애써 단정한 말투로 누르고 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며 이건 정말 봐줄 수 없다는 듯.
상담 직원들이 화가 나고, 답답하고, 궁금한 일로 전화한 고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고객서비스의 새로운 유행으로 부상한 적이 있다(아직도 많은 고객들이 실시간으로 사랑 고백을 받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언짢은 사람들에게 할 말로 적당하지 않고, 화날 일이 없다고 해도 부담스러우며, 대체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바쁘고 뾰족해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궁극의 표현까지 나왔겠는가 싶어 뒷맛이 쓰다.
요즘 K 의 물결이 거세다. 여기 저기 죄다 K가 붙는 시류에 편승해서 하나 붙여본다. K 고객서비스. A카드 상담원과의 통화에서 나는 고객 서비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 짧은 대화에서 그는 완전한 나의 편이자, 비빌 언덕이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징하게 푸대접받아 한껏 쪼그라든 해외동포에게, 별일 아니니 어깨 펴(고 돈을 쓰)라며 싹싹한 응원을 받은 느낌이랄까. 침착하고 상냥한 서비스가 따뜻한 샤워라면, 이건 승모근이 한방에 풀리는 뜨끈한 온탕같다. 이런 화끈함, 뜬금없는 사랑 고백보다 썩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