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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bo May 21. 2022

견디는 삶에 빛이 있다면  

존 윌리엄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스토너. 별 여섯


별 볼 일 없는 직장, 기쁨없는 결혼, 멀어진 자식,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 이른 죽음, 누구도 벅찬 애틋함으로 기억하지 않을 삶. 세상은 이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혹은 아무개의 아무런 이야기.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서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 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의 시작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스토너의 인생이 두 문단에 요약된다. 그리고 이 두 문단이 이 책의 전부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이 없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토너를 인생 책으로 꼽으며 이렇게 썼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이 소설은 '인생의 무엇'이 아니라 '인생의 인생'에 도달했다고만 적고, 나머지는 이 소설을 '2013년 올해의 책'으로 뽑은 줄리언 반스에게 넘긴다. "<스토너>의 슬픔은 그만의 종류에 속한다. (중략) 그것은 더 순수하고, 덜 문학적인 인생의 진짜 슬픔에 가까운 무엇이다. 독자인 당신은 이 소설에서 슬픔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종종 인생의 슬픔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때 그랬듯이, 속수무책으로 말이다." (가디언. 2013.12.13)' (경향신문. 2018.08.08)


소설은 인생의 고통, 상실을 다룬다. 그러나 밥먹고 화장실가고 회사가는 이야기로는 소설이 안되므로 최대한의 극적 장치를 만들어 독자를 소설가가 만든 세계 속으로 끌어당긴다. <스토너>는 너무나 평범해서 실패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삶의 이야기다. 한 남자가 공부하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병들어 죽는다. 1965년 처음 발표됐을 때 어떤 반향도 없었고, 40년 동안 세 번이나 다시 출간되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영웅, 성공, 강렬한 행복과 절망의 서사가 부재한 심심한 한 남자의 삶에 열렬한 반응이 있었다면 더 의아하다. 그래서 유럽에서 2010년대에 들어서 입소문으로만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도대체 읽고도 왜 그렇게 마음이 출렁이는지 영문을 몰라 간간히 눈물을 훔치며 밥을 먹고, 설겆이를 하고, 괜히 집안을 헤매다 며칠이나 지나서 메모장에 한 문장을 썼다. '견디는 삶에 빛남이 있는가.'


스토너의 삶에도 빛이 있었다. 영문학에 매료될 때 그랬고, 깊게 마음에 남았던 우정,  놀라움으로 반짝였던 아내와의 만남, 어린 딸을 돌보며 느꼈던 충만함, 그리고 영원히 먼 것으로 여겼던 깊고 뜨거운 사랑이 그의 인생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 짧았던 순간들은 길고 지리하게 풍화된다. 돌아보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은 고집을 부려 오래도록 미움을 사고,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기회는 원망과 체념으로 굳어져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다. 그 과정에는 반전도 행운도 없다. 그저 견딜 뿐이다. 꾸역꾸역. 서가에 꽂힌 채 햇빛을 받아 서서히 바래가는 책표지처럼 그의 인생은 늘 눈앞에 있지만 눈치채지 못하게 희미해진다.



김영하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최고의 소설이 뭐냐는 질문에 '다 읽었는데 밑줄을 친 데가 하나도 없고, 그럼에도 사랑하게 되는 소설. 읽으면서 한 번도 멈춰서지 않은......그런데도 왠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남에게 요약하거나 발췌하여 전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런 소설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답했다.


스토너가 나에게 그랬다. 이 이름 붙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애써 붙잡아보려 며칠을 고민했다. 평범한 삶의 위대함을 그린 소설이라는 설명은 와닿지 않는다. 스토너의 삶 어디에도 그렇게 기념할만한 부분이 없으니까. 작가 존 윌리엄스는 서문에서 스토너가 '진정한 영웅 real hero'이라 생각한다고 썼다. 좋아하는 일을 했고, 인생에 소중한 것, 보람있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삶의 영웅, 승리자..라는 공허한 수사처럼 들린다. 이 말은 출간 당시 소설가가 이 이야기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의식해서, 즉 '실패한 인생'에 대한 책이라고 규정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너를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재면,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이 묻힌다. 우리는 다른 질문을 해야한다.


코 끝에서 폐부까지 차가운 겨울의 공기같은 언어. 극도로 절제된 감정 묘사. 그러면서도 삶을 냉소하지 않는 깊은 통찰이 빛난다. 빛바랜 사진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 깊이 박힌다.  스토너라는 인간을, 그의 쓸쓸한 인생을 오래동안 기억해주고 싶다. 이 소설의 힘이 그런 것이 아닐까. 존재하지 않았던 이의 이야기를 내 안에 간직하고 싶게 만드는 것. 시시한 인생에서 스치듯 빛났던 순간들을 깊이 응시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나의 별볼일 없는 삶도, 범속한 이웃의 인생도 그렇게 바라보고 기억하고 싶다는 바람인 것이다. 어떤 것들은 오래 보아야만 아름다움을 알 수 있기에.


하와이에서 3년간 살았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한창 바쁘게 일하고 열띤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바다에 갔고, 어지간한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볼 무지개를 다 보았고, 가끔 산에 오르고, 매일 비 냄새를 맡았다. 자주, 오래 멈춰 있었다. 하와이를 떠난 뒤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곳을 그리워했고, 힘든 날이면 하와이 바다 꿈을 꾸었다. 바다에 떠있는 나는 물 아래 반짝이는 은백색의 모래 바닥에서 일렁이는 빛의 커튼을 내려다 본다. 꿈속의 바다는 햇빛의 색이다. 스토너를 읽고 한동안 잊었던 이 꿈이 생각났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서 포착했던 생의 정수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계속 이별하고 남겨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먹먹함으로 스토너는 그냥 살아낸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엑스트라처럼 살았던 그를 우리는 바라본다. 모두가 주인공만을 볼 필요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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