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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조금 먼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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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bo Apr 21. 2022

가랑비와 토네이도

K 방역열차 탑승기


한국에 갔다온 지 2달(아니 벌써...)가 됐다.


코로나 때문에 2년만에 간 터라 처리할 일이 많았던 것도 있고, 이래저래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는 핑계도 있고, 마침 도착하자마자 무섭게 닥친 오미크론 공포 때문에 더 위축됐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거의 매일 힘에 부쳤지만 막상 뭘 했는지 떠올려보면 아스라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사는 곳의 지난 겨울은 특히 어둡고 축축해서 우울함이 극에 달했는데 한국에 가서 생각하니 상대적으로 낭만적이기까지 한 쓸쓸함이었다. 슬슬 내리는 비를 맞고 젖어서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집에 들어가면, 벽난로를 맴돌며 한참 온기를 쬐고서야 조금 기운을 차리고 간신히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작은 한숨과 함께 입에 밀어넣는 정도였달까. 마음이 무척 황폐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리니 운치가 있을 지경이다.


자가격리가 끝나자 한국은 '오냐 너 잘 만났다'는 외나무다리 원수와도 같이 격하게 반겨줬다. 편의성이 극대화된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듯한 속도감이 숨쉬듯 자연스러웠던 시간이 분명 더 길었는데, 팬데믹을 겪고 나서인지 심신이 미약해진 탓인지 이것은 마치 스치기만 해도 집과 건물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토네이도가 사방에서 몰아치는 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으악.

예를 들면..이런?


그보다 더 놀라운 부분은 이 소용돌이의 복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 사이로 막가듯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엇 회오리가 있군...'팀장님, 아까 일어나자 마자 집이 토네이도에 무너져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지갑만 찾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유유히 길가 상점에서 볼일을 보고, 곁눈질로 토네이도의 진행 방향을 살피며 무너진 담장을 넘어 지름길로 호다닥 사라지는 그런 종류의 담대함이 매일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졌다.


너무 놀라 딱 벌린 입에 뭐라도 들어갈 새라 (한 손 아니고 조금 더 어리숙한 모습의) 두손으로 막고 얼어붙어 있는 나는 영원히 숨어있을 지하 방공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분주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의 복판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누군가의 갈 길을 막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럼 어느 순간에는 너그러운 이가 나의 팔을 잡아 끌어 정신을 차리게 해주거나, 친절하게 내가 (마땅히 한참 전에) 있어야할 곳으로 인도하고 다시 종종 걸음으로 갈 길을 가시는 것이었다(쓰고보니 새삼 다시 존경스러워서 존대가 절로 우러나온다). 내가 안쓰러워서라기보다는 나 때문에 가뜩이나 장애물로 가득차 빡센 길이 막힐 다른 사람들의 답답한 처지를 헤아린 탓일테다. 그렇게 늘 신세를 지고 있다는 느낌은 참으로 괴롭고도 소중했다.


돌이켜보니 한국에서의 시간이 대체로 분주한 와중에 쉴새없이 놀랍고 고맙고 성가신 경험이라는 것은 사실 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할 것 같다. 자가격리는 국가가 강제한 템플스테이일 것 같다고 막연히 상상했다. 요가하고 책이나 실컷 읽고 글도 써야지라는 깜찍한 계획도 있었다. 힐링이 별건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을 허허.


막상 맞닥뜨린 한국은 인천공항에서부터 물샐틈 없이 전속력으로 움직이는 방역 열차였다. 입국해서 겪게 될 모든 과정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없었지만 내가 했던 걱정은 결국 어찌나 자잘하고 쓸모없었던지. 착착 시키는대로만 얼굴이나 손목을 대고, 여권을 제시하고, 쓰임을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하고,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가 있나 싶은) 설명을 들으며 앱을 깔고(내 전화를 힐끗 본 요원님은 일주일 전에 깔아온 앱이 옛날 버전이라 쓸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어딘가에 개인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일괄 동의하고, 전자적으로 입국을 허가받자 잠시 혼자 짐을 찾는 시간이 있었다. (그 4분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오롯이 허락된 것은 실로 귀중한 여유였다.)


입국장으로 나가자마자 어느 시점에 마포구라는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휙 어디론가 안내되고, 어디선가 나타난 점잖은 남자분이 내 짐가방을 밀고 공항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아닌가.(방역택시 기사님이셨다) 저기...제가 가는 곳은 골목 안쪽 길이라서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언제 해야 욕을 먹지 않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휘적휘적 따라가다 다급하게 기사님에게 읍소해서 공항 안 편의점에서 물과 삼각김밥, 감동란을 낚아채듯 산 것은 이제와서야 고백한다. 나 따위가 목이 말라 죽을 것 같다는 사소한 이유로 한치 오차도 없이 시행되는 K방역에 누가 될까봐 조마조마했다.


집주소를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기사님은 인천공항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어딘가로 전화해서 공항과 마포구 사이에 주말 저녁까지 pcr 검사를 하는 곳을 수소문하더니, 분명 차로 진입할 수 없는 구간을 여러 개 지나 상암동 선별진료소 입구 앞에 정확히 내려주고 내가 휙휙 다시 검사소 컨베이어벨트를 지나 반대편 출구로 튕겨져 나올 동안 담배를 한대 태우셨다.(두개 피우기엔 딱 모자란 시간이었다)  30분여 동안 일어난 이 일들은 한 문장으로 쓰지 않을 도리가 없이 꽉 맞물려 있어서...숨찬 느낌으로 읽힌다면 더 없이 정확하다. 휴.


다음날 아침에 받아볼 수 있다고 해서 너무 깜짝 놀란 pcr 검사 결과는 아침까지 죽어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검사 후 일곱 시간만인 새벽 한시에 문자로 통보됐고, 이후 열흘은 시시각각 감시하는 자가격리 앱과의 눈치게임, 하루 두 번 자가 체크, 삼시세끼 챌린지를 위한 마트 주문 배송 배우기,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콜센터 운영으로 어휴 순삭. 너무 바빠 책은 무엇이고 글은 다 무엇.


자칫 어리버리한 이방인으로 남을 뻔 했지만, 내 안의 K 속도감은 역시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었는지...결국 돌아올 무렵에는 24시간 안에 초음파 검사 2종과 진료를 받고, 잇몸 치료와 더불어 즉흥적으로 생니를 뽑은 다음(--;), 상담이나 받아볼까하고 간 김에 세 종류의 레이저로 아직 이 뽑을 때 맞은 마취가 안풀린 얼굴 전역을 지진 것으로도 모자라 (그 동안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며 인왕산 카페에 가서 스티커를 더덕더덕 붙인 몰골로 사진을 찍고, 미슐랭 빕그루망에 4년 연속 선정된 맛집에서 두부젓국을 먹는 기염을 토했다는... 그런 기운이 쏙 빠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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