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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Feb 28. 2024

시댁으로 귀국했다. 1

시어머니와의 대결이 흥분됐다.




귀국해 직장도 없이 무작정 시댁으로 들어가 일단

세 식구가 얹혀살기로 결정했다.



남편나라 일본으로 돌아가면, 맛있는 진짜 초밥도

실컷 먹고, 남편이 좋은 곳에 취직도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일본의 새해 분위기와 음식을

굉장히 그리워했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풍족할 것 같았던 미국,  뉴욕이

아름다운 하늘을 볼 시간도, 센트럴 파크를 여유롭게 산책할 여유가 없었다.  화려해 보이는 미국이지만, 이민자는 가난한 나라, 미국에 환멸을 느낀 나는 한국과 가까운 일본으로 가고 싶기도 했다. 남편이 돌아가자고 했을 때, 어차피 미국에 계속 살아도 별 볼 일 없을 것 같았고, 한국과 좀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일본인에 대해 좀 안다는

동료언니가 한마디 조언을 해 주었다.


“ 영미야, 일본사람들은 밥 먹을 때, 주걱으로 밥을 열십자로 ‘-악“  그어서 한 공기씩 먹고 나면 밥 한 톨도 안 남는다던데 , 너는 밥도 많이 먹으면서  어쩌려고 일본 가니?” 안 가는 게 나을 텐데?라고 말하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언니도 참, 아무리 일본사람들이 초잡하다  해도

그럴 리가 있겠어요! “

딱 요만큼 씩  나누어졌다.

 

진짜였다!

시어머니는 밥을 한 공기씩 “딱” 퍼주면  밥통에 한 톨도 남기지 않으셨다.

얹혀사는 주제라 그것만 먹었다. 후식으로  나오는

후지 사과도 한 개를, 5등분 후 한쪽씩 나누어 먹었다. 배 고팠다.

딸기도 가끔 사 왔지만 6개 들어있었고 아껴먹어야 했다. 한 번에 1개 혹은 2개씩.  

철저하게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부엌 외의 장소에서 음식을 먹어선 안 되는 규율이 있었기 때문에 방에 숨어서 먹을 수도 없었다. 집이 좁고 노후된 주택이라  사람이 움직이면 다 들렸다.


숨어서 먹다가 들키면 ‘한국인이라 행실이 저렇다’라고 할 것 같아 행동거지에 조심했다. 그렇지만 집에 있는 ‘불당’ 만큼은 적응이 잘 안 됐다.



그녀는 매일 저녁밥을지어 ‘신토’ (일본 제국의 국교) 불당에 바치고,  오른쪽에 놓인 큰 목탁을 방망이 같은 것으로  두드리며 노래 음정을  올렸다 내렸다   ‘나무아미 타불’ ‘ 아무 아미 타불’ 염불을 했다.

그런 그녀의 목에는 묵주 대신 십자가  목걸이를 자주 했다.

부처님이 싫어하실 텐데 말이다.


대대손손 내려오는 희귀한 불상이니 밥과 노래로

달래주지 않으면 자신의 건강과, 내일의 여행지에 비라도 내릴까 봐, 하루도 빠짐없이 치성을 드렸다.


나는 불상 얼굴도 ‘거므스름 한 게 무서웠고, 이름 모를 일본 선조들의 명패와 오래된 벽에 걸린  흑백 사진을 보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흑백사진 속 ’ 조선땅의 진주 우체국장님이 ‘  이놈~~~ 조센징이 여기 왜 왔냐고 할 것만 같았다.  말은 일본어를 하지만 기도는 한국말로 하니까.


얼굴 모를 귀신이 저 미닫이 문 깊은 속에 숨어 있을 것 같고, 혼자 불당 앞에 있으면 무서움이 엄습해 왔다.  종을 치라고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절대 안쳤다. “댕~~~ 하고 울리면 무섭다.  시키는 데로  

초록색 향을 피워 무릎을 꿇고 예를 다 했다. 시시때때로 예를 올릴 일이 많았고, 맛있는 음식은 불당에 먼저 바쳤다.

보통 일본가정에는 불단이 있고, 저녁밥을 올린다


외국인 며느리로서, 부족한게 많을듯 해, 항상

고분고분, 뭐든 “네”“네” 하고, 몸을 쪼그린 기분으로 살방살방 걸어 다녔고,  교양 없게 ‘핫핫핫’ 하고 이빨을 드러내 웃지도 않았다.   

밥도 밥공기를 손에 들고 먹고, 미소국도 들고 마셨다.

그녀의 스타일에 맞추어 청소도 물걸레로 1. 2층을 닦아내고,  화장실도 싸디 싼 ‘락스’ 물을 타 바닥청소를 매일 하고, 20년은 족히 돼 보이는 ‘ 조화

아이리스 ‘ 잎도 락스 물에 세척해 줬다.

목욕탕도 나는 꼴찌였다. 내 앞으로 4명이 들어가, 때국물이 쩔었을것 같은, 욕탕에 ‘너무 추운 날만 찝찝해하며 들어갔다. 시아버님이 1등으로, 남편, 시어머니, 나와 딸 순서였다. 서열이 여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아버님과 욕탕에 함께 앉은 기분이었다


같은 욕조 물에 들어가는 문화는 일본생활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렵다.


일제시대 셀러브리티 딸이었던 (우체국장의 딸)

좀 젊은 시어머니는 기세가 등등했고, 소리만 안 질렀지 한국을 비하하는, 빙빙 돌리는 언어 기술로  나의 화를 돋았고,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하는 내게 다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딸을 위해 한국에서 사 온 ‘신데렐라  그림이 중앙에 크게 그려진 담요를 보고,

거기 사람들은 저런 얼룩 덜룩한 화려한 이불을 좋아하지?”  

색동한복을 비아냥 거리는 것이다)  나에게는 비수같이 들렸고 “조센징 은 저런 거 입지”?로 들리는 거다.  또 “그쪽(한국이라고도 안 한다)은

음식이 다 빨갛고, 섞어서 먹지?

자신은 빨갛고 섞은 음식은 절대 못 먹는다고 한다.

”그쪽 TV드라마는 만드는 게 무척 싼가 봐! 요즘은 틀기만 하면 한국드라마야!


그쪽 사람들은 드세잖니!

그렇게 “나의 나라, 너의 나라”를 분리하는 시어머니가 너무 미웠다.


나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꾸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의 언어를  차곡차곡 마음속 깊이 새겼다. 되갚아 줄날 이 오겠지!


어쩌면 시어머니는 비아냥거린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  일본이 아시아를 “재패 ‘ 하다시피 했으니, 자부심이 컸을 수 있고,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한국은 ‘조센징’ 조선인, 인 것이다.


이 역사를 겪은  ‘시어머니로서는, 천한 조선인이

내 집에 며느리로 들어와 있으니 기가 막혔겠다.


먼 옛날, 한국 진주에서 우체국 국장 ’을 지냈다는 그녀의 아버지.

조선땅  진주에서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의 어린 시절, 방이 99칸에, 정치인들로 집이 늘 붐볐고, 부리는 시종도 많았다고 했지만, 자신이 7 곱살 되던 때에 아버지가 죽고 끝이 나버려,  지금은 변변한 살림조차 없어 보이는데도,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진주 우체국 국장 가문을 대단한 영광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만 강조하는, 대단한 가문의  규칙을 빠짐없이 따르고, 눈치 보며 사느라 나는 진이 빠졌고,

입에서 “김”이 나오도록 추운, 이 집도 몸서리가 났다.


남편이 한밤중에 부엌에 살금살금 내려가, 딸기를

몇 개 씻어 오기도 했다. 시집살이 고되다는 소린 들어 보았지만 , 마음껏 못 먹는 시집살이가 2000년도에 웬 말인가!


지금 보니까, 그냥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과일을 한쪽이라도 먹여주셨으니,  중산층 임에 틀림없다. 식탐이 많은 나에게는 치사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시어머님이 아들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꿀밤을 사 왔다.

셋이서 열개쯤 먹었을 때 “ 많이 먹으면 ‘코피’ 난다며 더 이상 못 먹게 했다. ㅋㅋ   난 한 소쿠리  까먹어도 코피 난 적 없다.  두 개만 먹어야 했지…,

헛헛헛 남편도 멋쩍어 웃었다.  어찌나 알이 작은지 그늠에 꿀밤! 한국밤이 훨씬 크고 맛있다!!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은 일어났다.




 또 먹는 사건이다.

네 살 딸이 “엄마 배고파” 떡 먹고 싶어!라고 했다.

그래! 엄마가 얼른 만들어 줄께!

부엌으로 내려가,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켰다.

때마침 시부모님들이 점심을  먼저 드시고 계셨지만, 어린 딸이 식사 때까지  못 참아하니 나는 얼른 떡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5분이면 되는 것이었다.

찹쌀가루로 금새 만들 수 있고, 맛이 좋다.



시어머니가 일어나 오시더니, 가스레인지 팬을

아무 말없이 훽 돌리셨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밥을 드셨다.!

그리고는 “ 겐상! 떡 좀 나중에 만들래?”라고 했다. 내가 얼쩡거리는 게 신경이 쓰인 게다.


시 어머니의 말에 그냥 잠시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그날따라, 서러웠다.

이 모든  시추에이션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 맘 데로 자식에게 먹을 것을 못 만들어주는 이 순간, 얹혀사는 이 기분, 눈치 보이는 이 모든 일이 화가 났다. 성인인 우리의 처신도 잘못되었지만, 그냥 화가 났다.


화가 머리끝 정수리까지 올라간 순간,  “ 네 ” 알겠습니다 대신,  ‘떡이고 나발이고 부엌 개수대에 냄비채로, 다~된 떡과 함께 ’  ‘ 쏟아부어버렸다! 허~연 떡이 패대기 쳐졌고, 내  머릿속은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밥 먹던 젓가락 질도 멈췄다.

훽 돌아 ’  올라와 다다미방을 청소기로 힘껏 돌렸다.

화가 너무 나니까 피가 위에서, 아래로 ‘싹’ 내려가며,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고, 얼굴도 하얘진 것 같았다.


남편은 면접 보러 가고 없었다.


일제  강점기 ‘셀러브리티 시어머니가, 나와 대결하려고,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쿵쿵쿵’ 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집이 지은 지 무려 40년씩이나 된 나무주주택이라 그녀의 발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대결이 흥분됐다’


마치 기모노를 입은 것처럼, 오른손으로 긴치마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쭈-악”훑어 두 무릎을 꿇고 꼿꼿이 앉더니, 두 손이 바닥을 향하게 놓았다.

꼭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청소기를 손에 길게 잡은 채로 서서

 (흡사 긴 칼을 들고 선 장군 같은 모습으로) 나는 키가 170cm 가깝다. 

시어머니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고 서 있었다.  

집에서도 풀 메이컵을 하고 , 구르프로 정리한 파마머리를 한, 그녀의 얼굴이 꼴도 보기 싫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나도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것이 폭발할 것 같았다.

“김상! 고찌오 미떼쿠다사이”!

이쪽으로 좀 봐!라고 연신 외쳐댔다.


나는  최대한 목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 이 집에는 무슨 규칙이 이리도 많아요?  집이 왜 이렇게 불편한지, 너무 지쳐요!

지켜야 할 소소한 규칙이 너무 많았다.  

“우찌와 우찌노 야리카다가  아르노데.,,

이 집에는 이 집의 규칙이 있고, 결혼을 했으니 이 집의 법도를 지켜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 뭐 그런 소릴 했다.


서로 힘든 부분이 있으면, 이야기를 하고 해결을 해야 하니, 얼굴을 이쪽으로 좀 돌려서 나와 이야기하지 않겠니?  시어머니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열심히 말했다.


“아니요! 저는 말하기도 싫고, 지금은 어머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요. 보기도 싫고욧!


이쪽으로 얼굴을 좀 돌려봐라 얘야! 계속 무릎을 꿇은 채로 내게 자신을 좀 쳐다보라고 애원했다.


나에게 이 순간은 마치 ‘ 젊은 조센징과 늙은 쪽바리 ‘의 대결로 느껴졌다. 이 오래된 집에 저 어른들과 있으면, 저절로 (옛날 조선)떠올려졌다.



남의 집 같은 남편 집에서, 서툰 일본어로 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서러웠고, 일본이 싫었다. 그 순간부터 일본은 나의 적처럼 느껴졌고, 40년 된 이 집의 추위도 끝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을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고, 끝까지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 ‘늙은 쪽발이와의 대결을 끝냈다.  


아이 손을 잡고 집밖으로 나왔다. 보들보들한 딸의 예쁜 손,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늦게 낳은 유일한 내 핏줄이 이 땅에서 멸시받고 살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


미국에서  갓난아기를 3개월째부터 쓸쓸한 보육원에 4년을 보내고 살았는데 , 이 망할 일본에 오니  이게 머람?

참았던 눈물이 났다. 딸이 모르게 울면서 코딱지처럼 좁은 인도를 걸어 공원까지 갔다.


딸과 공원 모래사장에서 모래 놀이 하며 결심했다. 나는 너를 멸시받고 살지도 않게 할 것이며, 한국사람이란 걸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키우리라!

우리 엄마는 한국인이다 “라고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젠 너를 긴 시간 동안 나에게서 떼어놓지 않을 거야!

항상 같이 있어 줄게.



그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두 좌석 예약했다 일본 국민이 다 미웠고, 죄 없는 여배우들까지 역겨워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당장 떠나야 했다.

가진 돈을 세어보니 2500달러 밖에 없었다.

기가 막혔다. 시어머니가 아버님과 우리들이 생활비 내놓지 않는다며 소군거리는 것도 들렸다.

남편은 미국에서 부모의 돈으로 학교를 다녔고, 내가 직장을 다녀 가족이 먹고살았다.


나는 생활비를 낼돈도, 몇 개월 만에, 일본에서 일할 엄두를 못 냈다. 새로운 환경이 너무 두려웠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 아무 계산 없는 철부지기도 했다.

비싼 일본땅에 자식과 딸려온 우리가 반가울 리가 없다.




 돌아온 나의 나라 한국은 역시 포근했다.


넉 달을 한국에서 밥도 많이 먹고 , 과일도 실컷 먹었다.

문제는 딸이 이젠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했다. 아빠가 전화를 해도 “아빠”라는 단어조차 기억을 못 했다. 아이들은 외국어 잊어버리는 속도와 흡수하는 속도가 엄청나다. 한국말이  유창해졌다.


나는 딸에게 첫 언어로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었다.

“엄마” 이 말을 너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한국말은 가르치지 말고 일본말과 영어만 가르치면 된다고 했을 때  기가 막혔다.


“니혼고또 에이고 노미 오시에레바 이잉자나이노?”  일본어 영어만 가르치면 되지 않겠니?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상상도 못 해본 말이었다. 내가 내 자식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말라니?

이 분이 제정신인가 말이다.


나를 일제 치하에 사는 조선인으로 착각하시는 거 아니야?


어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면전에서 되 받아치지 않았듯이, 그날도 그랬다. 그냥 벙 쪄 있었다.  

대신 남편을 잡았다. “나보고 애한테 한국말 가르치지 말래? 이해 가니?   어미한테 어미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니?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해 소리 질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남편은 계단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잠시 후 시어머니 울음소리가 나고 “ 어떻게 니가 이럴 수 있냐” 며 울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속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울음소리가 유쾌하지 않았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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