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Mar 05. 2024

시댁으로 귀국했다 2

분가. 시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되고 좋겠다.

한국 온 지 2달이 지날 때쯤부터, 먼 친척 노인네들이 “남편 바람난다는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이 늦을 때는 결혼 타령으로  지치게 만들더니,..

한국은 친척이라는 단체가 힘겹다.


남편 바람‘난다는 늙은 친척들의 걱정에도 지치고, 점점 아빠와의 대화를 웃음으로만 대체하게 되는 딸을 보면서 걱정도 됐다.

슬슬 나의 가족에게 돌아가 새로운 땅에서, 용기 내어 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넉 달 동안 한국에서 편하게  어깨 쭉 펴고 다니고, 큰 목소리로 말도 하고, 크게 웃어도 됐다.


가족들은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생활비 한 푼 안내는 내게, 원하는 음식을 원 없이 먹여주고, 돌아오는 일본길은 온갖 내가 갖고 싶다는 이불가지며, 아기용품, 고춧가루까지, 가방이 터질 듯 넣어주고, 공항까지 안쓰러운 듯 배웅을 해 주었다.


가족의 따뜻함 속에 그동안 얼어붙었던, 내 가슴도 조금씩 녹았고,  다시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용 김’도 챙겼다.


‘나리타’ 공항에서 아빠를 만난 딸은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부끄러운 듯 아빠를 향해 웃고만 있었다.

‘오또우 상‘ (아빠)이 생각이  안나는 것이다. 4달 만에 그 잘하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 했다. 괜찮다!.

오늘부터는 한국말 잊어버릴까 걱정해야 한다.

내일이면 웬만한 단어는 떠오를 것이고,  한 달 후면 한국말이 ‘가물가물’ 해질 테니 말이다.


또다시 시댁의 2층 다다미 방에서 생활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집을 보러 다녔지만, 역을 중심으로

10분 이내의 맨션은 새집도 아닌데도 150만 원은 줘야 했다.



도쿄 변두리에 역에서 도보 13분 거리에 쓸만한 맨션을  월세로 겨우 구했다.  3달치 월세 보증금을

치르고, 시아버님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이젠

시댁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130만 원 월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미움이 더 커지기 분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어머니가 마룻바닥에 있는 물건창고를 열더니 ‘ 오래되어 보이는 젓가락, 포크, 그릇, 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물건은 모두 좋은 물건들이라 했지만, 내 눈에는 ‘고물’로 보였다.

박스를 열어보지도 않은 포크 세트며, 접시들이 옆에 있었지만, 낡은 물건 중 자신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 중에 ‘고르라고 ‘ 했다.


남에게 주고 싶을 리가 없지… 입으로는 ‘ 나는 너를 딸처럼 여긴다고’ 자주 말했지만,,,, 나는

이 말을 20년 동안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흰 바탕에 짙은 청색에 할아버지가 ‘낚시하는 그림‘이 그려진, 아주 이상한 접시들을 몇 개 얻었다.



새로 살림을 나가면 젓가락부터, 소소하게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내가 쓰던 아이보리색 영국 접시와 물주전자를 시댁에 두고 간 것이 생각나

“어머님 이걸로 가져가도 돼요?‘” 했더니 그건 안된다 하셨다.  

이거 내건데요?라는 말은 안 나왔다.

신세 지는 주제에,…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싸구려 중국식당 접시 같은 것과 이빨이 두 개 밖에 안 달린 포-크, 타월 나부랭이 들을, 돈 없는 나는 감사하게 받아 들고,  

기침 나는 다다미방,  과거 일제 강점기를 느껴지게 하는  ‘이 시댁을’시원하게 나왔다.  

              우린 서로 이런 기분이었겠다.



어릴 적부터 어른에게 말대꾸하면  안 된다. 어른들이 말할 때 끼어들면 안 된다.,.. 안된다. 안된다.!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은 나는,

시어머니의 얄미운  말에 대꾸 한번 안 했다. 통쾌하게 말 한번 쏘아붙이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미움받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은 게 사람이니까.



올고 그름을 떠나 , 같이 싸움이라도 했다면 좋았을까?  어떻게 처신을 하면 현명한 걸까?


어릴 적 나의 엄마도 할머니가 뒤를 따라다니며,  몸이 아픈 엄마를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엄마도 자신의 시어머니의, 말도 안 되는  신경질을 다 받아주고,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왜 며느리와 시어미의 관계는 늘 이런 걸까?

며느리는 참기만 해야 하고, 시어머니는 하고 싶은 말을 자유스럽게 해도 된다고 누가 그랬나!


“네”네 “ 고분고분하면, 상대는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게 된다,

나는 며느리는 이러해야 한다는 편견을 갖고 행동하고, 그녀 또한 한국 며느리에 대한 편견 속에서 서로 고통을 주었다.

공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어머니라는 존재.



신기한 건 나는 시어머니의 ‘ 말 ’ 때문에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자신이 늙으면 둘째 아들네!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몇 번을 내게 다짐하듯 말했다.


왜요, 어머니? 큰 며느리는 무섭고, 나는 만만해요?






















작가의 이전글 시댁으로 귀국했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