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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뚜기호롱불 Jun 08. 2022

1편. 막내딸 생일파티

그렇게 환자는 마지막 막내딸 생일파티를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남자 뒤로는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가 휠체어를 끌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은 세 명의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병원 냄새가 나서 무섭다고 훌쩍거리는 막내, 

병원 지하에서 뽑아 온 헬륨 풍선 2개를 손에 꼭 쥐고서 “여기는 왜 온 거야?”라고 엄마에게 묻는 둘째 

그리고 “엄마, 내가 아빠 휠체어 밀까?”라고 이야기하는 첫째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이고 들리는 것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자매에게 비어 있는 병실을 하나 내주고는 “여기서 엄마 아빠 기다리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고서 그 병실 문을 닫았다. 이후 30분간 환자와 보호자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보겠다, 포기하지 마시라 등의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나조차도 절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내 마음을 수습하기 바빠 그 순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4기 같은 말기 직장암이었다. 

보통 4기와 말기가 혼용되어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두 단어는 아직 시도해 볼 수 있는 치료가 있다와 없다로 나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말기’가 보통 1년 이하의 여명이 남았다는 뜻을 숨기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이다. 

이 환자는 원래 항암 치료를 하던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것 같은데 그래도 좀 더 유지해 보자”라고 해서 이 기회에 한방 치료도 같이해 보겠다고 온 것이었다. 내 생각이지만 그 병원에서도 이 환자에게 쉽사리 이제 치료가 큰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못 꺼낸 듯하다. 보통 항암 치료 도중에 병원을 옮겨서 치료를 이어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인데, 상황을 이해한 의대 교수님도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계속해 나가 보자”고 이야기를 해 주셨다.


똑바로 설 힘이 없어서 앉아 있을 뿐, 대화를 나눌 땐 건강한 사람과 똑같았다. 

환자와 보호자 모두 대기업에서 서비스직으로 같이 일하다가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더니, 다른 사람의 말을 정말 잘 들어 주는 부부여서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편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마침 나와 두사람의 고향이 같아 이야기가 더 잘 통한 건지, 

아니면 매일 옆에 있으면서 남편의 몸을 닦아 주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는 아내의 모습이 계속 보고 싶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처음에는 가운을 보면 도망가던 공주님들이 언젠가부터 엄마 몰래 숨겨 놓은 과자를 하나씩 내 가운 주머니에 살짝 넣어 주는 기분이 간지러워서였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 병실에는 발걸음이 자꾸 갔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맞는 항암제가 며칠씩 지연되고, 들어가는 주사가 하나둘씩 늘고, 진통제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중에도 부부는 거듭 병실을 찾아오는 나를 항상 웃으며 반겨 주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밖에서 가만히 귀만 기울이고 있으면, 낮에는 세 딸의 웃음소리 그리고 가끔은 투닥거리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고, 밤에는 딸들을 재우고서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세 달이 흘렀다. 

병원 냄새가 난다며 훌쩍거리던 막내 공주님은 언젠가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가 스테이션에 앉아 있을 때도 슬그머니 와서는 멀리 있는 의자를 옆에다 끌어다 당겨 놓고, 

“앉혀 주세요”

라고 말하며 두 팔을 벌려 안겨 오곤 했다. 

첫째 공주님은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랬듯, 엄마가 아빠 몸을 닦고 있을 때는 물을 떠 날랐고 엄마가 쉬고 있을 때는 엄마의 다리를 통통 두드려 주었다. 어쩔 땐 너무 일찍 철이 든 듯해 안쓰럽다가도 가끔씩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쉬는 엄마의 등을 쓰다듬는 모습은 무척이나 기특하게 보였다. 

헬륨 풍선을 쥐고서 병원을 두리번거렸던 둘째 공주님은 이제는, 

아빠가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아마도 그 세 달 사이에 앉아 있던 아빠가 어느 순간부터 누워만 있으면서 본인과 잠깐 놀아 줄 때 빼고는 잠자는 시간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우려하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는 이런 때가 오면 보호자만 따로 불러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건넨다. 

그 후에는 눈앞에서 통곡의 현장이 펼쳐지고 그와 동시에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자괴감이 몰려오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을 반드시 거쳐 가야만 환자와의 존엄한 이별을 준비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조차도, 아버지이자 남편인 이 환자의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을 놓지 못한 채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날 밤도 자고 있는 환자를 깨워서 이런저런 상태를 묻고 나가는 길에 막내가 따라 나오려고 했다.

“선생님 힘드셔. 그만 괴롭혀”라고 보호자가 딸을 말렸지만 괜찮다며 막내의 손을 잡고 나와서 스테이션에 같이 앉아 있었다.

몇 분 뒤에 첫째가 나오더니 막내에게 “너 잠깐 엄마한테 가 있어”라고 내쫓고 자리를 바꿔 앉았다. 

항상 엄마 옆에서 의젓한 모습을 보였던 딸이기에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인데도 괜히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 괜한 긴장이라는 양 첫째는 부끄러워하는 건지 미안해하는 건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봤다.


“선생님... 주말에 막내 동생 생일파티하는데... 와 주실 수 있어요? 그때 병원에 안 계시죠...?”


맥이 탁 풀리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당직이 아니라서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니 “이번이 아빠랑 같이하는 마지막 생일파티일 것 같아서요... 막내가 선생님 좋아하니깐...”이라는 말을 끝으로 첫째는 인사를 꾸벅 한 뒤 병실로 돌아갔다.


고작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아이의 부탁이었고, 아직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의 생일파티였다.


생각보다 성대한 생일파티였다. 

환자의 모친도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날 보고는 ‘익히 이야기 들었다며 고향 음식이 그리울 것 같아 반찬 좀 싸 왔다’고 챙겨 오셨기에 다 같이 병실에서 밥도 먹었다. 막내는 당시 유행하던 영화 캐릭터의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 재롱에 첫째도, 둘째도, 엄마도 오랜만에 활짝 웃었지만 무엇보다도 딸의 기운을 오롯이 받은 듯한 환자는 ‘오늘은 오래 앉아 있어도 안 아프다’, ‘오랜만에 제대로 앉아서 다 같이 식사하니 참 좋다’고 몇 번이나 복받쳐 했다. 그날 오후에는 며칠이나 지연되고 있던 항암 치료도 다시 받았다.     


그렇게 환자는 마지막 막내딸 생일파티를 보내고 마지막 항암 치료를 받고는 세상을 떠났다.


환자가 떠나던 순간 아내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환자를 잘 보내주었다. 

아마도 본인 등 뒤에 서 있는 세 딸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견뎌냈으리라 생각한다. 


장례식장으로 보내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때 막내가 나를 꼭 끌어안으며 

“선생님 저 갈게요. 또 봐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번호는 물론이며 집이 어디인지도 알고 나의 본가와 매우 가까운 것도 알지만, 그 모녀를 떠올리면 25년 전 부군을 일찍 떠나보내고 홀몸으로 두 남매를 키워온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 기도만 할 뿐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생일 파티 날 밤 모두가 자고 있는 시간에 병실 밖에서 혼자 있던 보호자의 표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병실 밖 계단 입구에 덩그러니 앉아 엉엉 울고 있다가 우는 소리를 듣고 옆으로 다가온 나를 보고서 

“선생님, 진심으로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라고 이야기해 주던,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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