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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영 Sep 05. 2023

불나방 연극단

 가끔은—아니, 거의 항상—연극을 올리는 과정이 연극보다 더 극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를 돈 없이 풀어야 하므로.


 가을 정기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미술감독인 E와 일개 무대스탭인 나는 무대를 만들 공간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보통 연극 무대 제작—‘셋업’이라고 부른다—은 목재를 잔뜩 주문하면서 시작된다. 무대 설계상 필요한 합판(벽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넓은 판)과 원바이(길다랗고 얇은 막대기)의 양을 계산해서 주문하면, 목재 회사에서 나무들이 트럭에 잔뜩 실려 학교에 도착한다. 그럼 이제 그 목재를 전동 톱으로 자르고, 전동 드릴과 나사로 조립해서 벽도 세우고 가구도 만드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과 연극 동아리는 항상 과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무대를 조립했다. 작업실 느낌이 나게 설계된 특별한 주차장이 아니고, 천장에는 파이프들이 지나다니고 바닥에는 항상 정체 모를 액체가 고여 있는 그 보통의 주차장 맞다. 휘발유 냄새 좋아해서 거기서 작업한 게 아니다. 눈치 제일 덜 보면서 어질러놓을 수 있는 공터가 거기였다. 문제는 여기마저 위험하다는 이유로 지난 겨울부터 사용을 금지당했다는 거다. 작업하다가 차에 치일 수 있어서 위험한 건지, 우리가 목재로 차를 긁을 수 있어서 위험한 건지는 결코 알 수 없었지만. 그럼 어디서 작업하냐고 과 사무실에 가서 우는 소리를 하자, 건물 옥상에서는 작업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옥상은 스크래치 낼 자동차나 기름 웅덩이가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지만, 외풍을 막아줄 벽이나 내리는 비를 막아줄 천장이 없다는 점에서 아주 절망적이었다. 젠장. 그래도 눈치 안 보고 작업할 곳이 있는 게 어디야, 하는 생각을 하면서 9월 정기공연 셋업이 시작하는 바로 그날 E는 옥상 문 손잡이를 돌렸더랬다. 철컥. 손잡이는 돌아가는데 문이 안 열렸다. 철컥철컥. 아무리 돌리고 밀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E는 별 걱정 없이 ‘아, 문이 잠겨 있나 보다. 조교님한테 열어달래야지’ 했다. E의 연락을 받은 조교님은 열쇠를 가지고 도착해서 연극 대사보다도 극적인 말을 했더랬다. “문은 열어드릴 수 있는데, 지금 벌 실험 중이어서 조심하셔야 될 거예요.” 엥? 벌? 그 붕붕 벌?

 빙고.

 내가 그날 E를 만난 건 그가 이 소식을 듣고 채 30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동아리방 한가운데, 10년도 더 된 소파에 앉은 E는 패닉에 빠져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옥상 써도 되긴 하는데, 양봉 옷 입고 하래요.” 내가 양봉 옷 입고 셋업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하자 E는 동의했다. “근데 오늘 비가 와서 걔들이 얌전하긴 했거든요. 괜찮지 않을까요?” “음, 지금 얌전해도 우리가 직소 들고 올라가면 화내지 않을까?” E는 공허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동의했다. 비슷한 대화를 서너 번 반복하자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옥상을 포기하고 다른 공간 찾기.


 가장 그럴듯한 후보지는 인문대 주변 공터였다. 이전에 인문대에 있는 소극장에서 공연을 올릴 때, 그 주변 공터에서 작업해본 적이 있던 터라 이번에도 작업실로 쓸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다른 팀이 인문대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면 셋업 장소가 겹칠 수도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원어연극제—노어노문학과, 중어중문학과 등 온갖 어문계열 학과들이 원어로 공연을 올리는 연극제—기간이라 인문소극장은 그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E는 공연이 가까워진 원어연극제 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혹시 셋업 어디서 하시나요?” 하나 둘 답장이 왔다. “자하연 주변 삼거리요.” “해방터요.” E와 함께 지도를 켜서 찾아보니 하나같이 그냥 길바닥이었다. “여기도 진짜 열악한가 보네.” E가 중얼거렸다. “연극 하는데 안 열악할 수가 있나?” 내가 대답했다. E는 당연한 말은 가볍게 무시한 뒤 질문했다. “뭐라고 답장할까요? ‘화이팅’? ‘보러 갈게요’?”

 인문대 어문극회들이 내가 점찍어둔 공터를 안 쓰고 있음을 확인한 뒤, E와 나는 몸을 일으켜 직접 공터를 보러 갔다. 다행히도 공터는 공터답게 비어 있었지만, 역시나 공터답게 흡연 스팟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래도 목재를 잔뜩 펼쳐서 어질러놓기에는 눈치가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인문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그 공터를 쓸 명분이 더더욱 없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혼내러 오면 어질러놓은 거 싸들고 도망가야 한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인문대 소극장 공터를 기각하고 E와 나는 다시 학교를 헤매기 시작했다. 남의 과 주차장들을 기웃거려 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 학교에 작업할 곳 하나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E에게 지적하자 E는 동의하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핸드폰으로 대여 가능한 공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공대 건물에 딸린 ‘아이디어팩토리’라는 이름의 목재 작업실! E는 당장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예약했다. 놀랍게도 작업실은 비어 있었고, 다가오는 4일 동안 아무 예약도 없었다. 목재 작업실이라니! 주차장도 아니고 옥상도 아니고 무려 정식 작업실이라니! 문제가 이렇게 쉽게 풀렸다는 게 믿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우리는 기뻐했다.

 E는 전화 예약을 끝내자마자 용달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 공대 건물로 목재를 실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나와 함께 작업실 쪽으로 걸어갔다. 용달 기사님은 우리가 도착해서 장소를 한 바퀴 둘러봤을 즈음 도착하셨다. 작은 트럭에 두꺼운 합판과 360cm짜리 목재 막대기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기사님이 짐칸 잠금장치를 풀면서 말했다. “학생들이 이거 뭐에 쓰게?” E가 대답했다. “연극 무대 만들려고요.” “무대? 아니, 학생들이 어떻게 무대를 만들어. 사람 따로 써야지.” E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저희 이거 스물한 번째예요.” 그러자 기사님의 표정이 불신에서 경탄으로 바뀌었다. “이야, 스물한 번째? 완전 달인들이네. 이러다가 졸업하면 집도 만들겠어.” 왠지 동아리 정기공연이 스물한 번째라는 뜻이 아니라, E와 내가 살면서 연극 무대를 스물한 번 만든 걸로 된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E와 나는 살면서 스물한 번째 연극을 올리는 사람들처럼 트럭에서 목재를 내리고, 기사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트럭을 떠나보냈다.


 E가 바닥에 수북히 쌓아둔 목재들을 감상하면서 말했다. “이번 나무 좋네요. 원바이 색깔도 예쁘고 파인 데도 거의 없고, MDF는 양옆을 치면 약한데 위아래 하중은 엄청 잘 견뎌요. 가구 잘 나오겠는데요?” 양봉 옷 입고 합판 썰기가 가능할지 고민하던 E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대답했다. “E 선생님은 오래오래 연극을 하실 것 같네요.” E는 극구 부인했다. 목재로 쌓은 산을 보고 뿌듯하게 웃던 표정은 그대로였다.


 연극을 올린다는 건 풀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풀려고 씨름하는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결국은 문제가 풀릴 때, 그 희열은 중독성이 강하다. 너무 강하다. 그래서 E나 나나 불나방처럼 이 엉망진창인 곳으로 매년 다이빙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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