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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영 Oct 07. 2023

그저 즐기기 위한 관객들을 기다리는

‘과학’연극에서 과학‘연극’으로

 보통 이름 앞에 ‘과학’이 붙는 것들은 재미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라고 돌려 말할 것도 없다. 뭐가 됐든 접두사로 ‘과학’이 붙으면 그냥 구려진다.

예시) 과학드립—썰렁하다. / 과학관—애들이 학교 견학 가는 곳이다.

 하지만 과학드립과 과학관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 번쯤은 이렇게 변호하고 싶다. 과학드립이 안 웃긴 이유는 웃어주는 사람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이 없는 농담이 어떻게 웃길 수 있을까. 과학관이 어린이용 시설처럼 보이는 이유는 어른들이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관도 퇴근한 어른들이 밤에 방문하면 힙해진다.


 과학연극도 마찬가지다. 과학을 가르쳐주는 연극이라 흥미가 떨어진다면, 관객인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용 교육 연극이라는 생각을 걷어내고 보면, 과학연극도 비로소 그냥 연극일 수 있게 된다. 이 사실을 가르쳐준 사람은 플라네타리움에 연극을 보러 갔을 때 내 대각선 앞에 앉으신 할아버지였다.

 얼마 전 국립과천과학관 플라네타리움에서 하는 과학연극을 혼자서 보러 간 나는, 자리를 잡다가 문득 깨달았다. 혼자 온 젊은이가…… 나밖에 없다! 보통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가면 혼자 공연을 보러 다니는 ‘혼공족’과 커플들이 객석의 대부분을 채운다. 그런데 1) 과학관에서, 그것도 2) 플라네타리움—돔 모양 천장에 별자리 영상을 쏴서 우주여행 수준의 멀미를 선사하는 곳—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니, 모인 관객의 약 85%가 초등학생 아이들을 동반한 3-4인 가족이었다. 공연 시작 10분 전, 거대한 플라네타리움은 아이들의 기침 소리와 질문하는 소리(“이거 언제 끝나요?”)로 가득 찼다. 난 그 가운데 멍때리기를 가장한 채로, 속으로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앉아 있다가 얼떨결에 불이 꺼지고 연극이 시작하는 걸 지켜봤다.

 연극은 리비트(Henrietta S. Leavitt, 1868-1921)가 정리 · 분류한 변광성 덕분에 허블(Edwin P. Hubble, 1889-1953)이 다른 은하가 말 그대로 억 소리 나게 멀리 있다는 걸 증명했다는 내용이었다. 공연 자체는 길지 않았고, 중간에 플라네타리움 천장에 은하 영상이 나왔다. 그런데 연극이 끝나자 예상치 못한 강연이 이어졌다. 서울대학교에서 오신 천문학 교수님이 연극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신다는 거다. 방금까지 은하 영상이 나오던 플라네타리움 천장에, 교수님이 준비해 오신 강연용 PPT 슬라이드가 떴다. PPT 첫 장에는 교수님이 직접 쓴 논문에 등장하는 그래프가 나와 있었다. 안 그래도 멀미 나는 플라네타리움 천장에 더욱 멀미 나는 그래프가…….

 곧이어 교수님은 리비트는 누구고 허블은 누구인지, 변광성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은하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등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하셨는데, 나는 그 순간 강의실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다 보면, 도저히 더는 앉아있을 수 없겠다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일종의 임계점이다. 그럴 때면 이건 문화센터 강의고 나는 지금 교양을 쌓으러 온 시민이다, 하는 최면을 걸곤 한다. 강의실에서는 그게 먹혀서 좀 더 참고 앉아있을 수가 있는데, 정작 진짜 문화센터 같은 상황이 되니까 제자리에 앉아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상황은 극단 기획님이 나와서 관객들의 질문을 받고, 교수님이 대답을 해 주시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빼곡히 앉아있는 어린 친구들의 질문을 모두 받고, 그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을 다 들으려면 우리 극단과 교수님 모두 향후 10년간 이 사업에만 집중해야 할 판이었다. 일할 때는 단순히 아, 퇴근하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우리 극단 관객과의 대화는 관객으로 들어도 긴 게 맞았다.

 바로 그때, 내 시선이 탈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교수님과 슬라이드가 아닌 무언가를 찾아 뱅뱅 헤매고 있을 때, 내 대각선 앞에 앉은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눈이 꽂혔다.


 막상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보니, 관객의 평균연령이 20대—젊은이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수의 40대 부모와 5-10세 어린이가 섞여있어서(사실 이럴 때는 평균이 아니라 최빈값을 들먹이는 게 맞다)—인 곳에서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는데 그때까지 못 봤다는 게 더 신기했다. 나는 교수님의 설명을 배경음악 삼아 할아버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질문했다. “밤하늘은 검은색이고 별은 흰색인데, 왜 건판에 별 사진을 찍으면 별이 검은색으로 나오죠?” 교수님은 설명했다. 건판은 얇은 유리판에 사진을 인화할 때 쓰는 약을 묻혀놓은 것인데, 빛을 받으면 그 부분이 검은색으로 찍혀나온다고. 할아버지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채로 교수님의 설명을 경청했다. 어딘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자세와 비슷했다. 다른 누군가가 질문했다. “검은색으로 나오면 뭐가 더 밝은 별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교수님은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한 뒤 대답했다. “저도 건판 쓰는 세대는 아니어서 직접 본 적은 없는데요, 건판에 별 사진을 찍으면 밝은 별일수록 크기가 크게 나왔다고 해요. 그리고 유리판은 두께가 있잖아요. 밝은 별일수록 유리판 깊숙이 검은색이 나와서, 평평하게 눕혀두고 보면 비교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할아버지는 교수님의 설명 중간중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상하게 할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으니 이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저 할아버지가 저렇게 열심히 듣고 계시는데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 아니겠어, 하고 설득이 된 걸까. 질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할아버지를 보다가 문득 어 그렇네, 어떻게 별빛은 하얀색인데 사진은 검정색이지, 하고 같이 궁금해졌다. 더 밝은 별을 찍으면 검은색이 유리판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는 교수님 설명을 들으면서 오, 그렇군, 하고 동조하게 됐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지켜보다가 비로소 여기가 극장이고,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러 주말에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재미가 없었던 건 교수님이 안 웃겨서가 아니고, 내가 강의 듣는 기분으로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마저도 이건 교육에 도움이 되는, 그래서 아이들만 보러 오는, 과학‘연극’이 아닌 ‘과학’연극이었으니까.


 과학연극이 한 편의 괜찮은 연극이려면, 강연이 아니라 연극을 보러 온 관객이 필요하다. 이걸 강의가 아닌 연극으로 봐 주는 관객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관객과의 대화를 흥미롭게 듣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덕질’에 능한 젊은 관객들이 필요하다. 과학을 배우기를 사랑하는 어린 친구들이 잠깐 빠져줘야 한다는 게 전혀 아니다. 그저, 정말 순수하게 즐기기 위해서 오는 관객들이 그만큼 많아져야 하는 거다. 스탠퍼드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지역 주민들을 위한 평생교육 과정을 운영한—그러다 그만 일반인을 위한 물리교재까지 내버린—레너드 서스킨드 교수는, 그 물리 교재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때로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방식이라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학생들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거기 있었다. 명망을 얻거나 학위를 받거나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배우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레너드 서스킨드, 이종필 역, ”물리의 정석: 고전 역학 편“, 민음사, 2017, p.8)

우리도 그런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단지 배우고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즐기기 위한 관객들을.

교수님의 무시무시할 정도로 흥미로운 PPT(!)와 열심히 질문하는 친구들, 그리고 높이 들린 손이 너무 많아 고민 중인 공연진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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