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cellaneous Mar 27. 2023

미국이 살기 좋다고요? 한때는 그랬었죠

미국에서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한 고군분투

22년 가을 무렵, 나의 달러통장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름에 월세를 아껴보겠다고 이사를 하게 되었고, 새로 들어가는 집은 월세를 입주 2달 전부터 걷는가 하면, 살고 있던 집은 두 달 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묶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4달치 월세가 수중에 없는 효과를 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전에 살던 집에서 보증금($1960, 한화 약 250만 원)을 곧 돌려줄 거라는 기대감에 초가을을 버티고 버텼다. 주변인들에게 물어봐도 보증금은 다 돌려줄 수밖에 없으니 못 돌려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들 했다. 보증금을 얼마큼 돌려주겠다는 statement(성명서)까지 받아놨으니 나도 걱정은 안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Moveout 하고 나서 메일로 받은 1,960달러에 대한 statement, 그걸 기어코 돌려받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30일 후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Lease contract document(렌트 계약서)에 명시된 30일이라는 기간이 지났는데도 아파트 관리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Lease office 연락처가 있어서 메일을 보내보았다. 돌아온 답장은, "아직 인디애나주의 법으로 규정된 보증금 반환기한인 45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미안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줘"였다. 대체 이럴 거면 계약서엔 뭐 하러 30일이라고 명시해 둔 건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어쨌든 연락이 된다는 것에 안도하고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래도 법치국가인 미국인데,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정도는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렌트 계약서에는 분명 30일 안에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45일 후

약속된 45일이 지났으나, 역시나 우리 집 우편함에는 광고전단지만 한가득이었고, 미국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도시전설이 비로소 나에게 닥쳐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메일을 보내보았고, 돌아온 답변은 상급 관리자에게 문의해 보겠으니 다음 달 1일까지 기다려달라는 이야기였다. 일상에서의 모든 소비가 저 보증금이 입금되는 걸 예상한 채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파산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때맞춰 환율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환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이 아파트의 구글 리뷰가 어떤지 확인해 봤는데, 보증금을 못 돌려받은 게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외국인 미국인 할 것 없이 다들 보증금을 아직 못 돌려받았다며 원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좀 더 찾아보니, 이 아파트의 문제라기 보단 이곳을 포함해 여러 군데의 부동산을 관리하는 Nelson Partners라는 회사의 탓이었다. 이 회사의 경영부실에 잇따른 재정악화로 거주민과 부동산 투자자들이 회사에 소송을 걸었고, 소송에서 패소하는 바람에 회사가 몰락하는 중이었다. "계약할 때부터 이런 뒷조사도 했어야 하는건데..."라는 후회만이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표현할 곳이 구글 리뷰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 아파트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니 계약하지 마라, 난 보증금을 돌려받을 때까지 이 리뷰를 철회하지 않겠다" 라는 내용이었고, 종종 아파트 측에서 리뷰에 comment를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자동응답기가 찍어낸 듯한 무미건조한 답변이었다.

인디애나 주 법에는 보증금을 45일 이내에 돌려주게 되어있으며, 이 기간이 넘으면 보증금 차감 없이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수임비까지 보상해 주게 되어있다.


60일 후

기다려 달라던 날짜에 역시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사실은 90% 정도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더 이상은 메일 보내고 답장기다리는 식으로 질질 끌고 싶지 않아서 Lease office를 직접 찾아갔다. 가보니 그곳에 매니저는 없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두 명이 앉아서 잡담이나 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내가 화나 보인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나에게 상투적인 인사를 건네며 보인 미소를 바로 거둬들이고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나: "못 받은 보증금 받으러 왔다, 너네 매니저 어딨어?"

직원: "지금 잠깐 없어, 너 근데 매니저가 여기 오면 보증금 준다고 했니?"

나: "물론 그건 아니야, 하지만 Indiana code, Lease document에 명시된 보증금 반환기간이 지났는걸?"

직원: "여기 와봤자 소용없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나: "겨우 그런 말 들으러 온 거 아니다. 직원으로서 너는 대체 뭘 한 거냐"

직원: "네가 화난 건 알겠는데, 우리도 메일 보내고 기다리는 수밖엔 없어"

나: "매번 나한테 기다리라고만 답장하는데, 적어도 왜 안 주는지 이유는 설명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직원: "이봐, 그럼 진실을 알고 싶어 아니면 변명을 듣고 싶어?"

나: "당연히 진실이지"

직원: "우리를 관리하는 Upper management (Nelson Partners)가 파산직전이고, 걔들은 이제 어떻게 비즈니스를 운영해야 하는지 조차 몰라, 너 말고도 보증금 못 돌려준 것만 10,000달러가 넘어"

나: "(한숨을 내쉬며) 그럼 네가 더 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지?"

직원: "너를 참조 (Carbon Copy) 걸어서 윗선 실무자에게 메일을 보내줄게, 우리한테 시간 쓰는 것보단 걔한테 고소할 거라고 협박하는 게 더 효과적일걸? 이거라도 해줘?"

나: "Okay"

직원: "메일함 확인해 봐 메일 보냈어, 이제 우린 다시 친구가 된 거지?"

나: "뭐, 그러시던지"



분노에 가득 차서 모든 걸 부숴버릴 것처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서는 결국 맥 빠지는 대화만 마치고 나왔다. 해결이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문제를 맞닥뜨린 것 같은 답답함. 꼬리에 꼬리를 무는 퀘스트가 마치 디아블로를 플레이하는 것 같았다.


'고소를 진행한다고 협박하는 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Small claim을 진행하려면 California까지 가야 하는 건가? 변호사는 굳이 없어도 된다는데?'

'고소를 만약 한다고 하면 본사가 있는 California까지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데, 승소하더라도 항공료까지 과연 보상해 줄까? 갔다가 패소라도 해버리면?'

'너무 아깝지만 그냥 포기할까?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는데'

'그냥 작정하고 다 받아낼 생각으로 고소할까? 이 참에 정신과 진료라도 받아놓을까?'


일련의 생각들로 나는 불면증까지 시달리기 시작했다. 생각을 어떻게든 떨쳐서 낮에는 본업에 몰두하다가도 적막하고 어두운 밤이 되고 침대에 누우면 갖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80일 후

열심히 구글링 하고 수소문해 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학교의 법률지원팀에 문의하는 것이었다.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당한 피해를 상세히 적어서 부서에 메일을 보냈다. 이와는 별개로 피해자가 더 생기는 것을 막고 아파트 회사에 생채기라도 내기 위해서 Consumer complaint(소비자 불만제기)를 Indiana의 Office of Attorney General(법무장관실? 정도로 번역되겠다) 제출하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 모든 활동을 마치 이미 법률기관에 제출한 증거자료처럼(실제로 제출하기도 했고) 보이게 하기 위해 Documentary evidence라는 이름을 붙여 첨부하고 윗선 관리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1. 렌트 계약서

2. 인디애나 code(규정)

3. 그동안 주고받은 이메일 기록

4. 보증금 반환 Statement(보증금을 돌려주겠다는 내용의 문서)


혹시라도 보증금 수표를 보냈다는 말로 나를 속이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할까 봐, 보증금을 Check(수표)로 돌려줄 것과, 그 수표의 Tracking number(송장번호)를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이 말고도 학교 법률지원팀에 문의한 내용, 그리고 Consumer complaint 까지도 첨부하고 싶었으나, 혹여나 이런 게 오히려 법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을까 해서 그냥 메일에다가 요약해서 적어놓기만 했다. 고심 끝에 메일을 보내놓고도, 나의 이런 협박이 참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미국인 입장에선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한다는 게 그거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정말 되지도 않는 하찮은 영어실력으로 내 분노를 한껏 표현해 보았다. 보내놓고도 이게 맞나 싶었다.


100일 후

몇 번의 메일이 더 오갔다, 내 메일은 더 윗선까지도 올라갔다. 일이 되려 커져버리는 건 아닌지 두려웠고, '미국에서 살려면 변호사 하나쯤은 있어야 된다'는 말이 불현듯 스치며, 내가 오히려 소송에 휘말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역시나 불면증은 사라지질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00일 만에 보증금 전액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은행에 가서 수표를 Deposit(예치) 시키고, 며칠에 거쳐 돈이 전부 계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과, 부모님에게도 어려움을 토로하지 못한 답답함과, 걱정과 스트레스와 노력이 올바른 보상으로 돌아왔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했다. 원래 받았어어야 하는 돈이라는 걸 생각해도, 잃었을지도 모르는 돈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돈을 벌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00일간의 고생은 나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마침 눈앞에 닥친 고환율에 환전 없이 갖고 있는 부족한 달러만으로 버텨야겠다는 생각에 인생에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긴축재정정책을 펼쳤었다. 너무나도 고달픈 내 유학생활을 짤막한 이야기로 남기기도 했다.

https://brunch.co.kr/@miscmds/34


가장 큰 변화는, 무조건적으로 찬양했던 미국에서의 생활과 미국사회의 특성에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 시민권자이자, 영어조차 잘 안 되는 외국인으로서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게 너무나도 답답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전세사기에 소송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건 내국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 같은 외국인에게 더 어렵고 힘들면 힘들었지 쉽진 않을 것이다. 

한때는 미국생활이 흠잡을 데 없이 정말 좋았다. 단점조차도 매력적일 정도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아무런 인맥도 친지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나 홀로 이런 일을 대응하고 나니, 이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였다.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좋게 마무리되었지만,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부족함 없다는 나의 생각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갔다. 


그닥 달콤한 기억은 아니지만, 나의 미국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에 이렇게 남겨보았다. 외국인 유학생 모두가 한번쯤은 겪을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부디 겪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서 배우는 긴축학 개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