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누군가가 손 내밀어 주고 등을 토닥여 줬으며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음을 늘 기억하고 있다.
올챙이의 기존 불안장애라는 정신과적 진단에 의구심을 가질 무렵 올챙이 학교일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이가 아픈데 학교일을 맡는다는 게 심적으로 부담스러워서 처음엔 거절했다가 어쩔 수 없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올챙이의 학교에서 만난 Y어머니 그분의 얘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다른 반에서도 자의 반 타의 반에 떠밀려 나온 어머니들과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일을 마무리하며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와중 Y 어머니께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희 작은 아이가 조울증 치료를 받고 있어서요."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충격이었다.
저런 심각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게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닌데...
사실 난 절친과 아주 가까운 가족 이외에는 아이의 병증에 대해 발설한 적이 없어서 실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 일 관계로 만날 때마다 늘 차분한 어조로 차근차근 논리 정연하게 말씀하셔서 배울게 많은 분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아이가 조울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인상을 심어준 분이었다.
헤어지기 전 그 어머니께 "내일 오전 중 제가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다음 날 아침 많은 질문거리를 준비해 조심스럽게 전화를 했다.
학교폭력에 휘둘린 그 댁의 둘째 아이 역시 심각한 조울증 상태였고 지금은 1년째 집에서 한시간 남짓 떨어진 A병원에서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동시에 받고 있다, 생각보다 병증 치료가 빠르고 효과적이다라는 언질과 함께 그 병원의 주소를 받았다.
알고 보니 우리 올챙이가 기존에 불안장애 진단을 받아서 2년 가까이 다니고 있던 병원과는 길하나 차이에 위치한 병원이었다.
홈랜드라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고 '불안 장애'라는 올챙이의 정신과적 진단에 물음표를 가졌고 Y어머니와 통화 끝에 라는 우리 아이도 조울증, 혹은 양극성 장애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양극성 장애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지아니 페다 박사가 저술한 '양극성 장애 자녀 양육하기'라는 책을 주문했다.
이틀 뒤 집에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차례와 서문을 지나 제일 첫 시작에 등장하는 7살짜리 로라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만 얼음처럼 온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로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예쁘장한 외모의 7살 난 여자아이인 로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을 즐기며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어른들을 대하는 데도 전혀 불편감을 느끼지 않는 아이입니다. 로라는 또래보다 성숙해 보였고 부모님들과도 마치 또래들과 이야기하듯 대화합니다. 부모님은 로라가 통제력을 상실해서 화를 내는 일이 매일 일어나곤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로라가 재주넘기를 하면서 사무실 한가운데를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로라에게 멈추라고 했지만 로라는 잠시 멈추었을 뿐 이내 다시 일어나서는 사무실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로라가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예의가 없으며, 따지기 좋아하고, 화가 나있으며 극도의 광분 상태가 된다고 했습니다.
-지아니 페다 박사 '양극성 장애 자녀 양육하기' 중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7살 로라라는 아이의 모습이 올챙이의 모습과 상당히 닿아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책을 들고 기존 올챙이가 다니던 정신과 병원으로 담당의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
늘 차가운 이미지로 무표정하게 진료상담을 받아오던 담당의사는 내가 최근 이런 책을 읽다가 이 책에서 발견한 로라라는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며 올챙이와 닮은 부분이 많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래서 저는 올챙이가 불안장애가 아니고 양극성 장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에 돌아오는 담당의사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느끼셨다면 그게 맞을 겁니다. 저도 그 부분이 의심돼서 지난달부터 약을 살짝 바꿨었는데... 아! 내가 설명 안 드렸던가?"
그녀의 뻔뻔하고 고자세의 태도가 더욱더 치를 떨게 했다.
이런 냉혈안에 안하무인인 의사한테 내 새끼를 내보이며 2년 가까이 치료를 의탁했던 나 자신에게도 환멸이 몰려왔다.
남들이 알까 봐 쉬쉬하며 혹시라도 아이의 교복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까 싶어 재킷을 벗기거나 덧입히거나 해서 병원을 오랫동안 다녔는데...
올챙이가 늘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이 효과가 없다고 그렇게 누차 얘기했건만...
'서울대 의대' 졸업장을 내건 의사의 말만 굴뚝같이 신뢰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 이래서 병은 감추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고 얘기했던가?
더 이상 그 병원을 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병증을 의사가 찾아내서 정확한 진단을 해야지 아무리 정신과적 진단이 어렵기로서니...
그동안 아이와 상담하고 나와 상담하며 유추해 냈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직업적 윤리 이전에 기본 아닌가?
이런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고!!!!
기존 병원에서 처방받았던 약 리스트와 의사소견서를 가지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Y어머니가 소개해준 길 건너 병원으로 옮겼다.
냉혈안의 안하무인, 늘 고자세로 환자와 보호자를 대하던 그녀의 의사소견서에는 '양극성 정동 장애'라는 일곱 글자가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