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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헤어짐을 경험 중인 사람

by 영자의 전성시대

"언니, 아빠가 얼마 남지 않으셔서 내일 가족모두 병원 들어오라네요."


아끼는 동생의 연락을 받자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곧바로 전화를 걸어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2달 만에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내일 가족 모두 병원으로 들어와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단다. 얼마 전 듣기로도 그렇게 까지는 악화되지 않으셨는데 확실히 연로하신 분들은 하루하루가 안녕이란 말이 맞는 것 같다. 고통스럽지 않게 천국을 보며 죽음을 맞이하길 기도해 달란다.


92세여서 남들은 호상일 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신은 자녀라 아빠를 끝까지 붙들고 싶다는 동생의 말이 안타까웠고 마지막까지 아버지께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에게 두려움이자 고통의 의미이기도 하고 삶의 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가 더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죽음이 주는 영원한 헤어짐이지 않을까?



얼마 전, 글쓰기 모임에서 상주 작가분을 모시고 자신의 글을 읽고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회원들은 열심히 글을 써서 미리 보내 작가님이 먼저 글을 읽어 보실 수 있게 했고, 당일 그분의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오시지 못한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글에 울컥했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이나 궁금했다. 정리하고 난 뒤, 그분의 글만 책상 위에 덩그러니 있어 내가 재빨리 챙겨 왔다.


바쁜 일들을 끝내고 식탁에 앉아 그분의 글을 읽었다. <일주일>이라는 평범한 제목의 이 글은 금세 내 눈시울을 적셨다. 기억하고 잊지 않으면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코코> 영화의 주제로,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모든 상황과 감정, 생각을 고스란히 기억하며 엄마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담하게 쓴 글이었다. 애써 슬프게 쓰지 않았음에도 그 담담함이 마음을 울렸고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으로, 엄마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느껴졌다.



우리 엄마도 지난주 4개의 검사를 받고 내일이면 결과를 들으러 간다. 암이 재발한 뒤 엄마는 살을 찌우기 위해 부단히 애썼고 가족들은 엄마를 건강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을 기울였다.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로해 갈수록, 힘이 삐질수록,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수록, 실수가 잦을수록 엄마가 늙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늙으면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것인데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


생각도 견딜 수 없는데 과거의 그 과정을 겪어내고 기억하려 애쓰는 그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며 아픔을 겪어내고 있는 동생을 보며 나 또한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임을 인지한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결코 좋은 경험일 순 없지만 이후 죽은 자와의 좋은 기억을 가지고 남은 자들은 살아가야겠지. 70이 넘는 우리 엄마는 아직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그리워한다. 납골당에 가는 길도 행복해하고 할머니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엄마, 나 왔어." 하며 대화를 나눈다.


이런 모습의 헤어짐이면 좋겠다. 돌아가신 지 한참이나 지난 외할머니와 대화하는 엄마처럼, 엄마의 죽음을 모두 기억하고 싶어 하던 그분처럼 육신은 헤어졌으나 기억 속에 마음속에 살아서 보고 싶을 때 꺼내보고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대화를 나누는 죽음이라면 헤어짐이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부디 죽음의 헤어짐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그 시간을 잘 견디기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누구도 빠짐없이 기억되고 잊히지 않기를 바라고 동생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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