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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Jan 06. 2023

미국 음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샐러드를 팝니다(3)

"니 고작 학원 강사 하려고 음악 했나?"



'아, 나는 지금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구나.'


모든 순간들이 산뜻한 봄 같았던 20대 초의 삶을 잊지 못하고 현재 지저분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나에게 연민을 느끼는 날이 많았다. 겨울 해가 넘어가는 텅 빈 매장 안에서 홀로 글을 쓰다 회의감이 들었다. 때때로 주변 어른들로부터 유학 갔다더니 왜 지금 그러고 있냐는 듯한 애처로운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자꾸만 과거를 그리워하고 내 처지를 비관했다.


하지만 광활한 우주 속에서 나는 한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이면서 폭풍우 치던 괴로운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나는 그 애처로운 시선들에 이제야 면역력이 생기는지 마음속으로 '어쩌라고'라고 차분히 읊조리며 다짐했다. 글로 회포를 풀고 이로써 과거는 이제 떠나보내자고. 그래야 다음 챕터를 열 테니.


Fantasy = 환상곡(幻想曲)

미국에 살며 있었던 수많은 일상과 사건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엔 지루하다. 오로지 내 삶이기에 특별한 것이니. 그래도 굵직한 것들만 짚어보자면 교내에서 오디션을 보고 Bigband Ensemble의 피아니스트로 선발된 것, 보스턴 총영사관에서 주최한 6.25 전쟁 참여 Veteran Appriciation Luncheon에서 연주한 것, 첫 자작곡을 쓰고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던 것, Tigran Hamasyan Master class에 초대받은 것, Project Band 피아니스트로 참여하고 받은 $500으로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홀로 유럽 여행을 계획한 것, 유명한 음악가들(Hans Zimmer Orchestra, Kurt Elling, Mark Guiliana, Brad Mehldau, Tigran Hamasyan, Julian Large, Shai Maestro, Robert Glasper, Jorge Roeder, Yotam Silberstein, Anomalie 등)의 라이브 공연을 본 것.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였던 Shai Maestro를 처음 만나 울며불며 인사를 한 것, 그 피아니스트를 찾아가 개인 레슨을 받은 것. 오직 그곳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많은 학생들은 각자가 가진 개성이 몹시 뚜렷했지만 공통적으로 음악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 모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환각 상태인 듯 들떠있었다. 미국에서의 파란만장한 대학 생활을 함께 거쳐온 친구들은 한입모아 이야기한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였다고. 사회에 발을 딛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음악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나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환경이었기에 비현실적인 음악 생활이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그저 환상곡의 낭만적 서사에 나부끼는 황혼의 갈대처럼 세피아 톤으로 흐려져가는 꿈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At a) Moment's Notice : without need of warning

'Moment's notice'라는 대표적인 비밥 장르의 재즈 스탠더드 곡이 있다. Bebop(비밥)은 빠른 템포, 복합적인 코드 진행, 복잡한 멜로디, 다양한 조와 코드의 변화가 특징적인 곡이며 빼곡한 음표들로 격렬하게 진행되는 음악 장르이다.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시발점은 곡의 제목처럼 경고 없이 닥친 부상이었다. 밤새 이 곡을 무리하게 연습한 탓에 피아노 전공생에게 치명적인 손목 건초염을 얻고 회전근개를 다쳤다. 하지만 하루빨리 공부 마치고 귀국하라는 아빠의 성화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막 두 학기와 Senior Recital(졸업 연주)를 혼돈 속에서 끝마쳤다. 졸업 연주를 하기까지 그리고 졸업 후 1년이 넘어도 낫지 않는 부상에 피아노 터치는 엉망, 연습 부족으로 실력은 내리막 길을 걸으며 낙담에 빠진 이 상황에 나는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해야 하는 26살이 되어있었다.


진짜로 예술에 발을 들이고 집 안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1편에서 언급한 미치도록 평범한 집 안에서 예술로 유학을 가서 맛본 짜릿한 자본주의 그 끝엔 우리 집은 진짜 지붕이 뜯겨나갔다고 밖에 설명을 못할만큼 커다란 참패가 있었다. 온 가족이 우울증이 걸린듯했다.


빚의 늪, 아빠의 달력에는 죽고 싶다는 고백이 쓰여 있었다. 12살 때부터 함께하던 강아지는 노화로 병이 들었고 그 치료 비용마저 감당하기 어려워 더 오래 살 수 있었던 강아지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들은 나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죄책감으로 하루하루 온몸이 짓누르는 듯했다

"당장 돈 벌자 불효자식은 이만하면 됐다."


두 번째 서울 유학

경제적 독립을 위해 2020년 1월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서울로 두 번째 상경을 했다. 20살 때 처음 그리고 26살 때 두 번째 상경. 졸업 후 3개월 정도 통영 본가에 머물렀다. 문화, 예술의 도시라고 불리는 통영이지만 청년 일자리가 없는 이곳에서 무엇을 꾀하기란 직접 창업을 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함께 음악 활동을 하자고 약속했던 대학교 동기들이 모두 서울에 있었기에 그 소속에서 떨어져 나오긴 죽어도 싫었다.


"니 고작 학원 강사 하려고 음악 했나?"

가까스로 피아노 강사자리를 얻고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니던 중 아빠에게 들은 말이다. 전화기 너머로 잔뜩 찌푸린 아빠의 미간이 눈앞에 선명했다. 나는 부동산 앞에서 끅끅거리다 이내 달아오른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아빠는 내가 슈퍼스타 피아니스트라도 되길 원했는지 투자한 것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음대생 나부랭이가 된 내 모습에 과거에 음악 하겠다던 나를 말리지 못했다며 후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막연하게 그려오던 졸업 후 내 삶의 전개방향은 이랬다. 일단 돈 벌이는 취미 레슨으로 시작해 차츰 입시 레슨으로 확장하기. 동시에 팀을 구성해서 연주 활동하기, 곡 써서 앨범 제작하기, 레코딩 세션 등으로 음악적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싶었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는 게 가장 큰 오산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려온 방향이라기보다 대부분이 이렇다. 특히 '연주자'나 '싱어송라이터'를 지향하는 음악인들의 졸업 후 삶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일을 스스로 끌어오고 만들어 나가는 프리랜서로 살아간다. 일반적으로 음대 졸업 후 엔터테인먼트, 음반 레이블 같은 음악 산업 쪽으로 취직을 하지 않는 이상 음악으로 '취업'을 말하기란 다소 어렵다. (실용음악 기준)




쳇바퀴

코로나 인해 음악 활동과 일자리에 큰 타격을 받긴 했지만 첫 근무하는 학원에서 힘든 상황도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버텨나갈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프리랜서 지원금과 서울시 지원금으로 여차저차 위기를 넘겨오며 1년 동안은 피아노 레슨과 찔끔찔끔 생기는 연주 생활을 큰 무리 없이 병행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 꼬였는지 매년 해가 넘어 갈수록 나는 정신과 몸 건강을 잃어가며 오로지 돈에 속박되어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진퇴양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가장 슬픈 것은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의 음들은 근심과 불안의 소리를 내었고 불완전한 주파수로 허공을 찌르며 '너는 이곳에 속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관객 앞에서 그런 연주를 선보였다는 것이 아직도 낯부끄럽다.


음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이렇다.

부모님의 지원으로 온전히 음악에 매진할 수 있었던 환경과는 달리 온전히 내 힘으로 A부터 Z까지 감당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사실 욕심이 많았던 거다. 이것도 잘하고 싶고 저것도 잘하고 싶고. 현실적으로 돈은 벌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고, 커리어는 쌓고 싶고, 함께 음악 하는 친구들 무리에서 소외되긴 싫고, 일하느라 연습 시간 부족해서 기량 떨어지고 자존감 낮아지고 정신도 나가고 몸도 망가지고... 여기까지만 하겠다.


블로그에 일기 쓰다가 왜 이 사달이 났지 하며 써본 서울 생활이 처참했던 이유

쉼 없이 달려온 내 탓이다. 누군가는 핑곗거리도 많다며 비난할 수도 있다. 20살 때부터 앞만 보고 내달렸다. 내가 가장 잘못한 게 있다면 진정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지 않은 것. 타인이 정해놓은 틀이나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규범에서 벗어나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 그리고 원하는 목표에 가치 설정을 하지 않은 것.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큰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음악’만이 전부인 작은 세상에 살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길을 잃기 망정이지. 그렇게 목표 없이 우선순위가 돈이 되어 살다 보니 어느 하나 해결되지 않는 제자리에서 쳇바퀴만 굴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이야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수식어를 쓸 수 없다.


아직은.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그래도 얻은 성과라면

그래도 서울에서 얻은 것들은 많다. 서울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벅찼던 타지 생활을 버텼다. 그리고 20대 초 학생일 때 잘 따랐던 선생님들께서 일자리 연결을 해주시곤 하셨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합주도 하고 주기적으로 재즈 클럽 라이브 연주도 하고, 재즈 듀오 결성으로 대관 공연도 해보고, 레코딩 세션 참여도 하고, 작사/작곡/연주한 곡 발매도 해보고, 틈틈이 커버 연주 영상을 만들며 나름 작은 성취를 느끼기도 했다.


20년에서 21년으로 접어들며 취미 레슨에서 입시 레슨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후로부터 선생님으로서 책임에 무게가 더 해졌고 나 자신보다 학생에게 초점을 맞춰야 했기에 점차 연주 욕심은 내려놓게 되었다. 다양한 성향의 학생들을 만났고 그중 모범적인 학생들과 시너지가 굉장히 좋아서 모교인 버클리 음대 오디션에서 장학금의 결과를 받으며 좋은 성적을 내주었다.


웃기게도 그 때 나는 입시 피아노 강사이자 동네 샐러드 가게의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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