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보다 결혼
나의 이십대는 싱싱한 젊음을 즐기기보다 혼란스러웠다.
학교 진학 때문에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슈퍼를 하는 큰 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 가는 시간 외에는 슈퍼 일을 도와야 했기에 내 시간은 없었다.
마치 새장에 갇힌 새가 된 것 같았다.
그 생활에 벗어나고 싶어서 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왔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30만원을 들고 다시 상경해서 간호대학 다니는 친구 자취방에서 한 달을 살았다.
하지만 친구의 애인이 들락거려서 방을 얻어 독립하면서부터 혼자가 되었다.
친정에도 손내밀 형편이 되지 못해서 오롯이 혼자서 나를 벌어먹여야 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구직 정보지를 뒤적이고 나를 불러주는 곳에 가서 일을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학창시절 만났던 인연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다가 사랑이 사람을 못 견디게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영영 이별했다.
사랑을 떠나보낸 삶은 후련함보다 무미건조한 회색빛이었다.
생기를 잃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던 나에게 새로운 인연이 다가왔다.
친정 언니 소개로 그를 만났다. 그날 소개팅은 잔소리라도 줄이겠다는 계산에서 나간 자리였다.
결혼 적령기를 놓치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같이 성화를 부리던 친정 식구들의 잔소리에 너덜해졌었다.
덩치가 있고 남성미가 넘치는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그는 약간 마른듯한 체격에 순둥스러운 인상이었다.
어차피 기대 없이 나간 자리라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 소개라 예의상 내색 없이 식사를 하고 헤여졌다. 한 번 만나면 되겠지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퇴근 시간에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만남은 이어졌다. 자주 보면 없는 정도 생기는 법인지 어느 순간부터 거부감이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12월 어느날 가볍게 근교로 나선 길에 눈이 내렸다. 펑펑 내리는 눈을 탐스럽게 바라보던 나와 달리 운전대를 잡은 그는 애를 먹는 눈치였다.
눈이 쌓여 거북이 걸음이 이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스노우 체인을 장착하느라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냥 앉아있기가 미안해서 차창을 내려 괜찮냐고 물었더니 귀까지 빨개진 그가 추우니까 창문을 닫으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차가운 눈 속으로 돌아갔다.
손발이 꽁꽁 얼었을 만큼 자기가 더 추웠는데도 나를 챙기는 모습이 감동이었다.
그 순간 그 사람 손만 꼭 잡고있어도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비로소 그를 향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차창 밖은 여전히 눈이 펑펑 내렸고 라디오에선 달콤한 멜로디가 흘러나왔었다.
그날 밤 풍경은 누구라도 연인이 될 것처럼 로맨틱했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연인 되었고 내 삶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 사람만 보이고 밤마다 헤어지기 싫어지는 콩깍지에 씌어서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해보니 남편은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새벽까지 술을 먹고 취해서 회사 동료들까지 함께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혼을 떠올렸을 만큼 힘들었지만, 첫 아이가 태어나자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남편은 가정적이었고, 순하고 본인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감사하는 걸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반론을 제기하는 걸 못 참아 했고 불만을 침묵으로 표현을 했었다. 기분 풀어주는 역할은 내 몫이었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를 닮아가는 중이다.
내 아이를 남편만큼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과 지금껏 나를 견뎌줬다는 두 가지 이유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 내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나의 혼란스러웠던 시간은 지나고 사랑하는 가족들로 인해 내 정체성이 생겼다.
독신으로 살았으면 알지 못할 든든함과 안정감이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라는 말이 있다.
나는 하는쪽으로 선택했다.
결혼생활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혼으로 인해 성장했고,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있다.
독신보다 결혼을 선택한 나는 전보다 더나아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