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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콤 쌉싸름한 여운

흰색 공간의 미학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찾아갔던 장소는 졸업 전시를 하게 될 갤러리였다. 석사 졸업 전시야 말로 3년간의 여정의 하이라이트자 꽃이 피는 순간이니 갤러리 공간을 미리 살피러 가는 건 당연지사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기둥과 벽면을 제외하면 모든 벽들이 전시의 주제에 맞춰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작품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것인데 전시를 준비할 때 이것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또 있을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내가 졸업 전시 공간을 기획해 볼 수 있는 때가 왔다. 갤러리에 전시 공간 프로포절을 제출했고, 내가 원하던 공간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내가 제출했던 졸업 전시 공간 프로포절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여우비 설화를 각각 6장면으로 나눠서 그림을 그리고 한 그림 당 한 벽면을 채운다. 벽들만 바라봤을 땐 병풍의 느낌을 주고 멀리서 바라봤을 땐 양쪽 기둥으로 인해 이야기가 적힌 가로 족자 느낌을 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병풍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이야기 책 같도록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길 바랐다.


갤러리 중앙에 의자를 두어 그림을 바라볼 때 아늑하게 나의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나의 그림 감상이 끝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다른 동기들의 전시 공간도 한눈에 들어오게 하고 싶었다. 이 부분은 하와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O'Hana 문화를 반영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었다. O'Hana란 '가족'을 의미하는데 한국인 정서 중 하나인 '정'이 있고 주위 사람들을 가족처럼 챙기는 화합 문화이다. 나만 생각하는 전시 공간이 아닌 다 같이 고생한 동기들에게도 공간으로 그동안 고생했다고 박수 보내고 싶었다.


졸업 전시 그림 반입 전 흰색 벽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 벽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매번 전시 반입 때 느끼는 나만의 두려움 포인트다. 과연 내 그림이 저 벽과 공간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린다고 그렸는데 벽을 장악 못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그림을 손 보자니 근 일 년간 계속 보고 또 봤던 아이들이라 내 눈이 익숙해져 버려 어디가 어색한지도 모르겠다. 두려우면서도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설치 준비를 한다. 이를 어쩐담. 관객들의 눈은 적확한데. 걱정 보따리 한 아름 안고 전시가 시작되면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찬 시간이 다가온다. 몇 개월을 불사르며 준비한 보람이 있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들은 마치 그동안 겨울잠을 자다 깨어나는 것 같다. 그림에 활기가 넘쳐 보이는 건 나의 기분 탓일 것이다.

갤러리 안 쪽에서 바라본 전경

막상 반출일이 되어 그림을 떼어내게 되면 흰 벽은 나에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크기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선사한다. 공허함과 허무함은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어딘가 알싸함이 올라온다. 마치 '꿈속에서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꿈이지만 깨어나야 한다. 한 이야기를 끝냈다는 안도감은 아주 잠시뿐, 그동안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헛된 것이었을까 혹여 꿈이자 이상을 좇아 달려온 시간은 결국 헛된 것은 아닐까 하는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속이 텅 빈 고독감으로 차 오르면 여기서부터 다시 나 스스로가 견뎌내고 극복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대신 견뎌내고 이겨내줄 수 없다.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이 고독을 이겨내는 것이 참 어렵다. 전시 경험이 적은 편도 아닌데 매번 새롭고 어렵다. 그만큼 매번 전시 규모에 상관없이 진심을 다해 준비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젠 흰색 벽이 선물하는 공허함과 허무함이 참 좋아졌다. 마음의 텅 빈 공간 안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씨앗이 있었다. 난 왜 이것을 그동안 못 본 것일까. 막이 내려야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연달아 굵직한 단체전들을 마무리 지어내고 있는 요즘 잠이 밀려온다. 근 3개월 동안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꽤 긴장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밀린 잠도 충분히 자고 맛난 것도 먹고 고독함을 풍성한 긍정적인 힘으로 채운 후에 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여정을 조만간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시작하기에 앞서 계속 졸업 전시 때의 공간을 살펴보게 된다. 졸업 전시 때 보다 더 흥미로운 전시를 만들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은 아직도 없지만 이제 다시 과감하게 색깔과 신명 나게 놀며 다시 한번 날아올라보려 한다.


전시를 준비할 때 마주하는 큰 흰색 벽. 매번 설치 전 흰 벽은 나를 집어삼켜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선물한다.
그림 설치 완료!

에필로그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섬에 상륙하기 직전 졸업 전시 오프닝 행사를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석사 학위 청구전 오프닝 행사를 치르고 섬은 곧 코로나에 잠식되었고, 졸업전시는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문을 닫게 되었다. 졸업 전시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못하고 졸업식이 취소되어 참석을 못한 건 아직도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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