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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프리트 Sep 04. 2023

끝나지 않는 이분법의 전성시대

-독서란 무엇인가?-

"마음의 양식"

독서를 권장하는 관용구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독서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기 직무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 어려운 철학책, 현실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동서양 고전 등 이런 책을 왜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특히 누구나 다 알지만 읽지 않은 두껍고 어려운 책은 왜 계속 인용되고 독서를 권장받을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독서의 목적은 '간접경험'과 ‘지식의 습득’을 비롯해 여러가지 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의 최종목적은 무엇일까? 


어느 날 '도를 아십니까?'를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분과 본의 아니게 토론을 했다. 그 분은 나에게 태양이 언제 지냐고 물어봤다. 난 일몰 시간을 이야기 했지만 그분은 그게 아니라 정오부터 해가 지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일출이 아니면 일몰만 생각하던 나에게 또 다른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역시 세상에 아무리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도 부정적인 것을 걷어내고 나면 배울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 법이다. 


적과 아군, 오른쪽과 왼쪽, 흑과  백, 좋은 놈과 나쁜 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맞지만...)

이름만 바꿔서 진행되는 지긋지긋하게 끝나지 않는 이분법의 전성시대이다. 먼 훗날에 이 시대를 '이분법의 시대'라고 명명할 지도 모르겠다. 진실인 양 포장하면서 혹은 가치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을 악마화하여 사회로부터 격리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자 '또는 '무언가가 결핍된 자'들의 흔한 도구가 이분법이다. 아직도 그런 이분법이 통용되느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엄연히 통용되고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자와 사용자, 선생님과 학생, 의사와 환자 등 대립된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존재들을 빌런으로 만들어 이분법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은 편견이 없고 중립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이 옳은 일과 옳은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엔 중립인 사람과 옳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는데 왜 아직도 케케묵은 이분법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일까?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혹시 아름답지 못한 것을 필연적으로 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야 물론이지요."

"그럼 지혜롭지 못한 것은 무지한가요? 지혜와 무지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그게 뭐지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네. '옳은 의견을 가졌지만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대도 알다시피, 그것은 아는 것도 아니고 무지도 아니라오.-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어찌 지식일 수 있겠어요? 진실에 관여하는 것을 어찌 무지라 할 수 있겠어요? 옳은 의견이야말로 그처럼 지혜와 무지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과 양 극단의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옳은 의견이 존재한다는 설명은 플라톤이 그의 사후 몇 천 년이 어떻게 흘러갈 지 예상하고 경고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 독재시절 체제유지와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수많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절이 끝났고 전세계에서 유래 없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개의 성과를 함께 이룬 한국에서는 예전 독재시절보다 더한 ‘빨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한 담론과 행동들이 이름만 바꿔서  계속되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그러한 주장들이 과거엔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에 국한되었지만 요즘은 전 세대와 전 직종에 걸쳐 지식인 노동자 할 것 없이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이렇게 썼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갈리아이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진다고 

로마인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해 그토록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타민족에 대한 개방성과 유연함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의견처럼 로마의 개방성은 요즘 시대와 비교하면 놀랍다. 예를 들어,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에 편입시킨 삼니움족 의 평민 출신 오타틸리우스는 전쟁 이후 20년 뒤 로마의 집정관이 된다. 그리고 그는 1차 포에니 전쟁의 지휘관이 되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북한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100년 전 어쩔 수 없는 공산당 가입 경력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사회에서 이처럼 이분법을 벗어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었던 개방성과 유연성은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로마의 번영보다 더 중요한 점은 로마의 멸망이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도 로마의 멸망이다. 개방성과 유연성은 한번 주어진다고 계속되지 않는다. 콜린맥콜로우가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로마의 일인자들'편을 보면 로마의 개방성은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를 나누어 구분지어 사고하던 권력자들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로마의 개방성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유지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멸망사에 나오듯 내부의 부패와 이민족의 침입 등에 의해 나라가 두 개로 쪼개졌고 결국 멸망했다. 로마의 번영은 이분법을 극복했기 때문이고 로마의 멸망은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사례는 이분법은 한번 이겨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얻어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끔 나 자신을 생각해본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독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면 난 참을성 없고,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한 것을 옳다고 여기면서(실제로는 나의 이익)  극단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독서는 나를 그러한 길로 가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보니 어떠한 독서가 중요한지가 중요해졌다.  

20살에 읽었던 책 몇 권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과 지식의 양 떠나서 말이다.  특정 시절의 독서가 그들을 바꿨지만 중단된 독서로 인해 그들을 고정되게 만들고 그것이 다시 그들을 이분법의 노예로 만들고 있었다. 로마처럼 말이다. 나 또한 그러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한 시기는 가랑비에 옷젖듯이 스물스물 오기 때문에 나중에야  나중에야 깨닫는다.  

스마트폰과 미디어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 과거만큼 독서가 활성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독서가 줄어들면 사람들은 플라톤의 대화에서처럼 '아름답지 못한 것'을 '추하다' 고 쉽게 생각해버릴 가능성이 높거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독재시절에도 보기 힘들던 이분법이 요즘도 힘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독서는 간접경험이나 지식의 습득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독서는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해석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다. 

독서는 나를 긴장시켜 나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지키려는 노력이 없으면 로마처럼 무너진다. 

우리도 로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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