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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Nov 28. 2022

라이벌을 소개합니다.


영화 <관상>의 이정재처럼 온다. 그녀가 스케이트 가방을 흔들며 링크장에 등장했다. 이런, 오늘 스케이트 수업은 비상이다.


나의 라이벌.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으로 수업 시작 전부터 몸이 굳었다.

쫄면 안돼!

6개월 전 그녀와 나는 토요일 2시 레슨을 함께 받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막 스피드스케이트에 입문했고, 나는 다년간 기본기만 다져오던, 직선은 좀 탈 줄 아는 경력자였다. 링크 위에서 걸음마를 하는 그녀와 직선은 탈 줄 아는 나의 실력 차이는 곧 점점 좁혀졌다. 세상 몸치인 나에겐 익숙한 시련이다.

'내가 직선 코스를 타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든, 그녀도 곧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가겠지.'

두 달 정도 함께 수업을 듣다가 내가 월요일 저녁 시간으로 레슨을 옮기면서 그녀와 수업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코너 크로스를 넘겼다. 우리 둘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소식을 전했다.

"크로스하는 모습 찍어 둔 동영상 보내 드릴까요? 자극 좀 받으시라고요."

"아니요! 동영상은 괜찮습니다."

(선생님, 나가양... 그런 동영상 봥 자극 받아시민 진작 크로스 해실꺼우다. 제발 저 기 죽이지 말아줍써예.)


그녀의 실력은 그동안 나를 제치고 앞서 나갔던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시게 성장했다. 스피드스케이트에 입문한 지 5~6개월 만에 생활체육빙상대회에 나가 2위를 했단다. 대회 상장이 아이스링크 게시판에 떡하니 걸렸다. 그동안 그녀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나는 삐약거리며 발전했다.

'옴메~, 기죽어'


레슨 시간은 달라졌어도 난 그녀가 링크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일부러 염탐한 것은 절대 아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딸아이의 피겨스케이트 레슨 시간과 그녀의 연습 시간이 겹쳐서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스케이트화를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두 번이나 바꿨다. 지금 신는 스케이트화는 선수들도 신는다는 삼덕 스케이트화다.


'다들 결국엔 나보다 잘하니까. 김보미보다 스케이트 잘 타는 게 가장 쉬웠어요. 아닐까?

시즌1 김보미보다 테니스 잘 치는 게 가장 쉬웠어요.

시즌2 김보미보다 요가 잘하는 게 가장 쉬웠어요... 에 이은 시즌3 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녀의 연습 모습을 지켜보던 내 뒤통수에 얼얼함이 급습했다. 한 대 세게 얻어맞았다.


긴장이 역력한 눈으로 오른발을 들어 왼발 너머로 넘기는 모습. 마스크 안에서 이를 악물었을 거라 짐작되는 딱 그런 눈빛이었다.


그. 녀. 도!

나. 처. 럼!

크로스가 무섭다!


크로스는 나한테만 무섭고, 다른 사람에게는 쉬울 거라 생각했던가? 크로스는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녀의 떨리던 눈빛이 며칠간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난 원래 운동신경이 없으니까, 난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라... 크로스를 못하는 핑계를 100가지 정도 찾으면서 못난 나를 합리화하느라 바빴던 건 내 안의 어린아이였다.


그녀가 크로스를 잘 타는 모습이 아니라, 그녀의 노력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나에게 영감을 주는 나의 뮤즈, 나의 라이벌이다.

"아줌마, 아줌마도 노력해봐요. 그러면 저처럼 스케이트 잘 탈 수 있어요!"

00 초등학교 1학년 이윤진(가명). 그대는 나의 뮤즈, 나의 라이벌.


아줌마도 이 악물고 달려볼게! 삐약 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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