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마주하는 누군가의 관점에 반기를 든다
친구찬스로 초청 티켓을 받아 들고 전시회장을 갔다. 신진 아티스트들을 발굴하는 기획으로 꾸려진 전시장은 꽤나 힙한 장소에서 한껏 힙한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내보이며, 주말아침 잠결에 일어나 어수선하게 집어든 옷을 입고 집에서 나선 나를 내밀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전시장은 크고 넓었으며 그만큼 다양한 작가들을 수용할 만큼 공허하고 여백이 넘치는 곳이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갤러리들의 부스는 빽빽하게 마주하고 있어서 완벽한 좌우대칭의 사선으로 배치된 가벽이 어디서부터 관람 동선을 잡아야 할지 모르게 균형감을 유지하면서도 어지러웠다. 오픈시간에 맞춰 입장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주말의 시작을 작품과 함께하려는 사람들로 전시장은 소소하게나마 관람객과 스태프들로 뒤엉켰다.
전시를 한 바퀴 돌아본 동행자는 작품들에 흥미로워했지만 동시에 흥미를 잃었다. 본인 조카가 (그는 이제 말을 트기 시작한 3살일 것이다) 끄적이며 그렸을 법한 스케치를 앞에 두고 실소를 내보이기도 했다. 작품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었을까 고민하는 찰나에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짧은 몇 초에 눈길을 끄는 작품은 몇 안된다. 나는 수영장에서 숨을 참고 있는 우스꽝스러우면서 모호한 분위기 속 여자를 눈여겨보며 그녀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일지 아닐지를 고민했고, 방충망으로 한 꺼풀 차단한 상태에서 창밖의 노을을 내보는 작품에서 작가의 시선에 쓸쓸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아 먹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작품에서는 마른 꽃들을 이래저래 묶어낸 꽃다발이 생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롭게 한데 모인 회화의 조합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또, 철재 조각을 종이접기 하듯 접어서 입체 구조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위트에 어리둥절하며 그가 앞으로 보여줄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늘 예술을 접하며 누군가 얘기한 한 문장의 조각이 떠오른다. 작가는 너무나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어서 가공하고 편집되며 여과된 결과물에 너무 익숙해진 현실에 젖어든 대중들은 작가의 작품이 던지는 낯선 구조에 당혹스러워함을.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혹은 눈앞에 놓인 것이 진실되며 곧이 곧대로의 현실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지 대중과 작가의 서로 연결되지 않은 간극사이에서 관람의 묘미가 발생한다. 매일의 익숙함에 낯선 시선을 요구하는 누군가의 의견에 타협점을 찾을 수 없는 자아는 기억력을 더듬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자리 잡은 관성 탓으로 거부감만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유명세를 자산으로 삼아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방송인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최근 유명인을 비롯하여 주변인을 미끼로 삼아 발전된 기술을 딥페이크 하여 범죄로 악용하는 사례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은 인간에게 양쪽의 방향을 제공했다. 신기술을 좋은 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선택지로 골라 사람에게 이롭게 활용할 수도 있지만, 늘 그렇듯 양면에 그리워진 그릇된 유혹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본능 탓인지 기술은 범죄에 가담되는 수순을 밟았다.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자는 현실을 그대로 현실로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억울한 감정을 담아 토로했다. 진짜가 말하는 진실이 더 이상 진실이 되지 않고 외면당하며, 가짜가 만들어낸 진실이 수용되며 전파되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녀 자신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방송을 통해 현실을 현실처럼 말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는 행동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스스로가 또 다른 현실의 왜곡 대상이 되는 상황을 비판하게 되었다. 누가보아도 초상권을 침해당해 의도적으로 악용된 사건은 사람들에게 범죄로 인식되며 동의를 얻지만, 교묘하게 가려지고 가공되며 수정된 의도를 우리는 범죄로 까지 바라보지 않는다. 약간의 도발과 잠깐의 유흥을 위한 가공은 용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충분히 현실을 그릇되게 현실로 반영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는 다면 그것은 과연 현실 그대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애초부터 진짜라고 언급할 수 있는 본질에 다가선 존재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가공되고 수정되며 누군가의 의견이 더해져 부풀려지고 과장되는 현실을 누구는 진실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혹자는 그것이 오류이며 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파헤치고 수정하며 또 다른 현실을 만들고자 했다. 잘못된 기술을 이용하여 현실을 왜곡하는 것 자체에 비난을 피할 길은 없다.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서도 안되며 관성처럼 유희와 흥미위주의 놀이거리로 삼아서도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에 앞서 대중은 필연적으로 자각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현실이 아님을. 근접하게는 미디어를 통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생산되고 만들어진 가공된 부산물에 자신을 재료로 삼아 콘텐츠를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것임을 주의받는다. 그렇게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 항상 의심되고 경계를 받는 현실에 있음에도 자각하지 못하고 편협한 관점으로 살아가기를 요하는 디지털의 경계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사고하고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감에 씁쓸한 마을을 감출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