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나면 온종일 글 쓸 줄 알았다. 그래, 온종일은 과하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이라 정정한다. 예상인지 기대인지와는 달리, 책상에 앉아있지 못했다. 그랬던 데에는 어떤 그럴싸한 이유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퇴사 직후 이어진 이혼 때문이거나 사무실에서 쓰던 것과 같은 책상과 의자 때문이거나 결혼 생활 내내 함께 했던 물건들, 그것들이 구성하는 공간, 사방 모든 곳에서 송진처럼 묻어 나오는 끈적한 기억 때문이거나. 이런 것들이 책상에 앉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결국엔 모두 변명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힘이 없다, 의욕이 없다, 우울하다 쓰기도 했던 것과 상반되는 것은 그렇다고 앉아있지도 누워있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밖을 부지런히 쏘다녔다는 것이다.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다는 사람치고 매일 같이 밖을 헤매면서 무언가를 했던 것은 아이러니다. 책상에 앉아 검은 스크린 앞에 가만히 앉아있을 의욕은 없지만 기록적인 무더위를 뚫고 밖으로 나가 나무 그늘에 앉아있는 의욕은 무엇인가?
힘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고 그 사정을 살펴보면 그럴 만도 하지만, 관념적 반증이 아닌 경험적 반증이 여럿 나타날 때, 의견의 힘은 약해진다. 그래서 의견은 곧이곧대로 믿을 게 못 된다. 힘들다, 어렵다, 싫다고 의견을 쏟아내면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검은 스크린과 마주하거나, 아무 의욕이 없다면서 카약 타러 갈 꿍꿍이를 꾸미거나, 베케트와 폼므라를 읽고선 뚱딴지같은 희곡을 쓰고 있는 의욕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 아무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힘도 의욕도 없고 우울하다고 하면서 반대로 힘이 되고 의욕이 생기면서 기쁠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고 있는 것이다. 욕구하는 자에게 어떻게 의욕이 없을 수 있는가? 욕구가 무욕을 넘어서는 것 아닌가, 때에 따라? 아니, 무욕이란 것은 선사 스님들의 머나먼 가르침일 뿐인가? 어쩔 수 없는 건가? 신체는 아침이면 일어나고자 욕망하고 낮에는 움직이고 밤이면 잠들길 욕망한다. 신체는 그 자체로 욕망이다. 한 번 더 뛸 심장의 욕망과 움켜쥘 손의 욕망, 걷고 달릴 발의 욕망, 혈관을 타고 온몸에 흐를 피의 욕망... 이곳에 힘이, 의욕이 정말 없는가?
의욕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의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욕할 대상이 무엇인지 몰라 헤매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겐 의욕의 대상이 있다. 그간 무수히 많은 것들을 하고 또 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 수많은 것들을 통해 이제야 담담히 인정하게 된 것은, 글을 통한 자기표현의 욕망이다. 돌고 돌아 결국엔 글이다.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하고 그 많은 시간, 바깥을 헤맸는데, 지금껏 글을 넘어서는 것은 없었다. 내 안에 적막 속 태동, 여러 인격, 그것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지난 삶이라 부를 것에서 이어져 내려온 모든 것이 끊어진 지금, 드디어 정박할 때가 왔다. 글의 세계. 내면의 세계. 앞은 여전히 짙은 안갯속처럼 깜깜하지만, 내겐 이곳밖에 없다. 이곳이 내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