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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Dec 10. 2023

선생님, 어디 계신가요?

명화 달력에서 오렸어요. 찰스 코트니 커런의 <Summy Sky>. 책상 위 책탑 중간에 그림을 붙여 두었죠. 더위 끝자락 팔월 달력을 넘기면서. 





흰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에 느슨하게 팔을 올린 여인은 머리 위로 두둥실 떠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고 발을 디딘 바위처럼 굳건하게 보여요. 힘을 뺀 듯 휘어진 손가락들과 딱 벌린 다리에서 우아한 자신감이 느껴지고요. 멀리 눈길을 주는 옆얼굴을 가만 보면 입술 사이 살짝 틈이 있는데요. 부푼 가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 걸까요. 하늘과 지상 사이 오르고 싶은 높은 땅에 올라선 여인을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이 밀려와요. 바람에 나부끼는 치맛자락과 모자에 두른 푸른색 긴 리본처럼 물결치듯이 말이에요. 


그림 속 여인은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진 듯해요. 저 여인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렇게 싹튼 것인데요. 동경이란 자신에게도 그 같은 자질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라고 하네요. 저 여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음이 제 안에도 있다는 걸 알아요. 다만 기우뚱한 중심을 일으키며 자신을 응원하는 중이죠. 심리상담사 마리사 피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본래 자신감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중 대부분을 청소년기에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오랜 시간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선생님도 제게 말씀하셨지요. 자신감을 가지라고. 내가? 언제? 대답하실 테죠. 당신이 아는 한 저는 자신감 있는 아이였으니까요. 꿈에 선생님을 만났거든요. 그때 제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러니 어리둥절하실 테죠.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학교와 집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은 물이 말라 돌의 강이 되었어요. 하지만 강 건너 솔숲 너머 살구색 초등학교 건물은 그대로 보여요. 폐교가 되기는 했지만요. 어쨌든 그 건물 이층 육 학년 교실에 눈길을 주면 당신이 떠오르곤 하죠. 치아가 들쭉날쭉해도 크게 웃는 당신. 어깨에 닿는 웨이브 머리에 진분홍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고 있는 당신. 


지금 어디 계신가요. 제가 졸업한 햇수를 헤아려 보다가 그 옷을 입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마중 나온 당신을 생각했어요. 기억나시나요? 무슨 일로 심하게 아파 당신이 학교에 나오지 못한 날. 반 아이들 몇몇이 버스를 탔죠.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한 시간을 가서 버스 종점인 터미널에 내려 병문안을 갔어요. 그때 철없었죠. 그 바람에 아픈 당신은 쉴 수도 없었으니까요. 아무튼 잘 찾아왔다고 반겨주시던 얼굴이 아련하네요.


그 후 저는 선생님 댁에 한 번 더 가서 잠을 자기도 했지요. 영어 경시대회 날. 이른 아침 시골집에서 시내 고사장까지 가기 번거롭다고 당신은 저를 댁에 재우셨잖아요. 일곱 살, 다섯 살 남자아이가 둘 있는 좁은 집에요. 제게 베풀어 준 그 마음이 얼마나 큰마음인지 헤아릴 수도 없어요. 저라면 당신처럼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저를 예뻐하셨다는 것도. 제가 특별히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 대표로 뽑아주셨잖아요. 그뿐이던가요. 남 앞에 서는 일 많았으니. 선생님이 주선한 일 아니었나요. 그것도 모르고 저는 뭐든 잘한다고 착각했나 봐요. 그래서 졸업 문집에 들어갈 제 글을 읽고 당신이 한 말에 얼어붙어 버렸나 봐요. 


딴 거는 잘하면서…… P의 글 좀 봐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제가 글을 너무 못 쓰나요? 꿈에서 제가 당신에게 물었죠. 당신은 제가 더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셨고. 제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세요? 또 묻자 당신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셨지요. 당신의 진심을 이제는 알아요. 하지만 초등학교 육 학년 아이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몹시 낯설었죠. 무엇보다 당신이 평가한 말이 진리인 양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어요. 


제 글을 읽으면 누구든 당신처럼 인상을 찌푸리라 생각해서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살며시 주는 쪽지에 답장도 할 수 없었어요. 대학교에 가서는 국문학과 학생들을 볼 때면 신기했어요. 어떻게 글쓰기를 좋아할 수 있지 생각하면서요. 그들이 부러웠어요. 


그나저나 뭘 하든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요. 그러니 늘 긴장할 수밖에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학위까지 받은 뒤에 글쓰기를 배우러 갔던 거예요. 과제로 글을 쓰다가 제가 왜 글쓰기를 피하고 싶어 하는지, 막연하게 두려워하기만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어린 시절 당신의 그 말로 제가 저를 규정했다는 것을. 사실 당신의 말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말이지만 그때는 지금과 같은 이해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까요. 


글을 쓰다가 저는 또 알게 되었죠. 저의 진실을. 그리고 소망을. 그것은 제가 선망하기만 한 종족이 되는 거였어요. 작자라니. 믿어지시나요? 글쓰기로 미지의 저를 만난 순간 제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믿을 수 없었어요. 제가 쓴 게 아닌 것만 같았어요. 원하는 걸 알면서도 뒷걸음질을 쳤죠. 하지만 계속 자신을 배반할 수만은 없잖아요. 언젠가 죽을 테니까요. 죽음의 문턱에 선 저를 상상해 보았거든요. 나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사는 동안 부여잡은 당신의 말은 각인되어 있었어요. 그것이 제가 글 쓰는 삶으로 나아가는 걸 가로막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당신이 원망스럽더군요. 미안합니다. 그 말을 신념으로 부여잡은 게 전데요. 그 말로 자신을 제한한 게 전데 말이에요. 자신에게 상처 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수십 년을 그러고 있었네요. 자신을 해치는 줄도 모르고. 


제자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스승이 그 마음을 품고 있어도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는 건 기적에 가까운 경우도 있어요. 당신의 말을 마음으로 느끼는 지금에야 당신의 마음을 알겠어요. 당신이 제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도요. 


당신의 말이 아니었다면 저는 글쓰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 모르겠어요. 그 말 덕분에 저는 글을 잘 쓰고 싶어 했고, 글쓰기를 배우면서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 말이 저의 길로 들어서는 데 필요한 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요.     



선생님도 순천만에 가보셨겠지요. 용산 전망대에 올라 갯골을 오래 바라본 적 있어요. 아시는 대로 강물은 바다를 앞에 두고 직진하지 않았죠. 곡절을 무수히 그리며 구불구불 흘렀어요. 굽이치는 물은 애달플지 모르지만 바라보는 이는 넋을 놓고 말아요. 그렇지 않나요? 산을 내려올 수 없더군요. 석양이 질 때까지. 물은 어쩌면 그토록 아름답게 흐를까요. 내달려온 바다에 다 와서 방향을 계속 바꾸면서요. 무엇을 꿈꾸기에.


이리저리 부딪치고 파란이 많은 우리 인생길도 저 높이 하늘의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면 아름답게 보일까요. 물길의 행로를 보면서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과 닮았다 싶더군요. 그렇게 한참 보고 있으니 휘어지는 굴곡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알겠더라고요. 그러자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 굽이치는 게 당연하다 싶었어요.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니 숨바꼭질 같네요. 어찌 우왕좌왕하지 않고 숨은 자신을 바로 찾아내겠어요. 바다로 흘러드는 물길처럼 굴곡이 있어도 괜찮지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다 방향을 이리저리 틀면서 가고 있잖아요. 물길도. 인생길도. 자기를 사랑하는 길도. 우리가 만나는 길도. 


굽이치는 사이 이야기를 가지게 되겠죠. 자신만의 이야기를. 선생님, 있잖아요. 저 시도 쓰고 소설도 쓸 용기를 내었어요. 자신을 가둔 감옥 문을 비로소 열고 나왔어요. 그래서 불완전한 언어로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어 당신께 편지를 써요. 부치지 못한다 해도. 생각의 에너지는 물길과도 인생길과도 달라서 직진하는 길로 갈까요. 편지를 쓰는 동안 당신은 솔바람 부는 학교와 무소식 속에 묻힌 제가 불현듯 떠올랐을까요. 


당신, 다시 오시겠어요. 꿈으로 온 그날처럼. 아니, 제가 갈게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 만나려면. 함께 바다로 흘러가려면.  


그림 속의 저 여인의 마음에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선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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