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롭 Nov 08. 2024

그대 뒤에서 부르는 나의 노래는

雲水飄然獨去時 

구름 따라 물 따라 홀로 훌쩍 떠나가는

爾身曾入畫兼詩 

그대 이미 그림과 시 속에 들어가 있네

明朝拂袖尋無處 

내일 옷자락 날리며 찾아갈 곳 없으니

桂子天香秪夢思 

계수나무 꽃향기 다만 꿈에도 그리우리


송인, <시축의 시에 차운하여 운문 상인에게 題贈雲門上人 用其軸中韻>     



한 사람은 곧 떠난다. 수없이 헤어져도 번번이 낯선 순간. 떠나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르기가 쉽지 않다. 입 안에는 무수한 말이 들썩이는데 겨우 꺼내놓는 말. 전화할게. 또 만나자. 언젠지 모르지만 훗날을 기약하는 말.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의 등을 떠미는 손 같다. 벌써 그날을 기다리게 하는 그 말.


정작 지금 여기는 세상의 끝이다. 누가 내일을 장담할 수 있나. 정말 끝이라 생각하면 가슴속에서 큰 물결이 일어난다. 거미줄처럼 얽힌 오해와 미움과 원망을 다 쓸어 버리는. 단 하나의 진실을 싣고서 출렁이는 파도가 가슴 저편으로 밀려가도록 두는 게 옳으리라. 거기 부려 놓는 것이 먼바다의 젖은 모래 같을지라도. 


그대, 알고 있나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대는 나의 시를 사랑하지만 나는 그대라는 시를 사랑합니다. 이제 등 뒤에서 몇 줄 읽기도 전에 사라질 그대. 마지막 모습을 내 안에 그립니다. 그대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얹어 그대에게 당도할 수 있다면. 구름을 따라 물을 따라 흔적도 없이 가는 그대. 앞길에 순풍이 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대 향기 짙어지겠죠. 꿈에도 그리운 계수나무 꽃향기. 


점점 멀어져 가는 이의 아련한 뒤를 쫓아가는 한 사람. 그이의 등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떠나는 이에게 한 말은 홀로 선 가슴에 흐르고.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돌림노래가 되어. 그대, 알고 있나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 같은 가슴을 그 말이 버석거리며 파고들면, 그이와 맞잡은 손을 놓을 때 흘리지 않은 눈물은 그때 떨어질 테지.  


중종의 부마 송인이 떠나는 운문 상인에게 준 시를 읽으면 이별하면서도 고백받는 기분에 휩싸여 눈을 감게 된다. 시이고 그림인 그대. 꿈에도 그리운 그대라는 말. 첫 포옹 같은 말을 가만가만 되뇌다가 두 팔로 자신을 안는다. 운문 상인은 송인에게 받은 이 시를 아껴 한때 경전보다 시축을 자주 펼쳐보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에게 더 극진하지 않았을까. 외롭게 내버려 둔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청산을 내려가 서울의 먼지로 납의가 까매지도록 이름난 시인을 찾아 시를 구하곤 했으니까. 자기가 누군지 모른 채.



에드바르 뭉크의 <두 사람, 외로운 이들>



그들의 이별 방식과 고백이 새삼 떠오른 건 땅끝에 선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이다. 에드바르 뭉크의 <두 사람, 외로운 이들> 앞에서. 바다를 향해 돌아선 여인은 등으로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고 남자는 여인의 등 뒤에 고개를 숙이고 엉거주춤 서 있다. 그들만의 세상 끝에 다다른 두 사람.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서 헤어지는 그때. 서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가슴에 메아리칠 그 말은. 


이제 여인은 바다를 건너가고 남자는 육지에 남는다. 그가 나아갈 수 있는 데는 해안가. 여인이 떠난 뒤 남자는 파도가 밀려오는 그곳에 동상처럼 서 있으려나. 그의 전신은 그래서인지 땅끝과 같은 색이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가 바라보는 건 그녀의 머리카락일까. 마치 여인이 가져가 버린 남자의 심장인 듯 붉은 머리카락. 그가 그녀에게 매혹된 정도를 알려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돌아보지 않는 여인이 구름과 물과 동행하여 바다를 항해한 끝에 정박할 항구는 떠나온 곳.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다. (또 다른 사랑일 수도 있지만.) 여인이 입은 순백 원피스 위에 굵은 선으로 그어진 노랑과 파랑의 의미로 볼 때 바다를 응시하는 여인은 희망으로 설레는 듯하다. 하지만 대비되는 색으로 나뉜 그녀의 옷은 분열하는 감정의 그림자가 아닐는지. 한 사람을 뒤에 두어야 하는 마음이 어찌 쓸쓸하지 않겠는가.


둘 다 외롭기는 마찬가지. 두 사람이 외로운 까닭은 돌이킬 수 없이 혼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 사람과의 거리보다 자신과의 거리가 멀수록 외로움은 깊으니. 그럼에도 아예 자기를 버리고 그가 혹은 그녀가 되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누군지 상대에게 확인을 받으려 하지 않았나. 땅끝까지 가도록 끝내 자신을 알지 못한 채 이별하기 때문에 외로운 이들. 


자기에게서 달아나면 뒤따르는 일은 각자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도 한 사람과의 이별은 끝나지 않는다. 심장의 말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언어밖에 모르는 그 말을 전해야 비로소 이별과 함께 떠나리라. 달빛 같은 말이 홀로 가는 이를 비추는 길을.     


작가의 이전글 선생님, 어디 계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