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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Nov 23. 2024

카약을 타고 여행하는 달

오후 두 시 직전. 옥순봉 출렁다리 정류장에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하루에 버스가 세 대 정차하는 그곳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서 있고, 출렁다리를 건너려는 많은 사람이 매표소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월 마지막 날 내가 거기까지 간 까닭은 출렁다리를 건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아래에서 카약을 타기 위해서였다. 카약은 언제 타는 게 좋을까. 나는 언제 타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북미 원주민 위시람족에게 묻는다면 시월이라고 답하리라. 그들은 시월을 ‘카약을 타고 여행하는 달’이라고 부른다. 왜 다른 달이 아니라 시월에, 다른 것 말고 카약을 타고 여행을 하자고 다 같이 약속하듯 정해 두었을까. 궁금해하다가 그래, 그들처럼 해 보자 싶었던 것이다. 시월이 가기 전에 카약을 타고 옥순봉으로 구담봉으로 가보자고.


제천역 앞에서 수산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십 분 동안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옥순봉 출렁다리 정류장에 내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들떠 있었다. 오늘 옥순봉을 지나 구담봉까지 가봐야지. 비용을 더 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만의 생각은 얼마나 아슬한지. 입 밖으로 말을 꺼내보면 금방 드러난다.

카약을 타고 구담봉까지 갔다 올 수 있을까요?

옥순봉 출렁다리 아래서만 탈 수 있어요.

카약 체험장 대표가 말했다.

구담봉은커녕 옥순봉도 가지 못한다는 말에 기대한 마음이 내려앉고 있었다. 곁의 테이블 위에 올린 왼손 손가락을 지팡이처럼 아래로 세워 짚고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옥순봉까지도 못 가나요?

옥순봉까지 간 경우는 일출 때 한두 번뿐이라고 그가 말했다. 유람선이 다니기 때문에 위험해서 옥순봉 출렁다리 아래에서만 탄다고. 그러면서도 내가 거기 가는 이유에 관심을 보였다.

거기는 왜 가려고요?

옥순봉이 보고 싶어서요. 멈추어 옛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요. 그들의 뱃놀이 배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카약인 것 같아요.


이황이 단양 군수 시절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죽순처럼 생긴 봉우리에 반해 그 봉우리 이름을 옥순(玉筍)이라고 붙였다. 옥순봉은 원래 청풍에 속해 있었으나 단양 입구라는 의미로 이황이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고 새긴 후 단양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비타민 음료가 든 박스에서 비타 500 두 개를 집었다. 오전에 어느 지자체에서 카약 체험장을 만들려고 컨설팅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그들이 사 온 것이라고 하며 내게 하나를 건넸다. 나는 가방을 열고 청량리역에서 산 호두과자를 꺼냈다. 아직 네 개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그에게 주고 낱개로 포장된 세 개를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려놓으면서 생각했다.


전에 혼자 여기 왔을 때 단체객 수십 명 사이에 끼여서 탔다고 말하면 그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옥순봉으로 가는 도중에 산기슭으로 카약을 몰아 절터를 그가 알려주었다는 말도 하는 게 좋을까.  


손님이 카약을 타면 그는 모터보트를 타고 동행하면서 사진을 엄청나게 많이 찍어주는데 한꺼번에 몰린 단체객한테 신경을 쓰느라 나를 챙기지 못해서 미안해했다. 내가 옥순봉 쪽으로 방향을 틀자 그가 다가와 유람선이 다녀서 혼자 가면 위험하니까 단체객을 보내고 인도해 줄 테니 출렁다리 아래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단체객이 돌아간 뒤 다가오는 모터보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릴 때 그만 타라고 할까 봐 불안했는데 그가 정말, 갑시다. 옥순봉으로, 하는 게 아닌가. 놀랍고 감사한 그날의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 흘러가 버렸으니까. 그 전날 내린 폭우로 황토물이 된 남한강도 물빛 하늘의 구름도.      


사무실 밖 출렁다리 입구는 차를 대절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설레는 목소리가 섞여 수선스러웠다. 출렁다리로 가는 사람은 줄을 잇지만 카약을 타러 오는 사람은 없어서 운영이 되는지 은근히 걱정되었는데 주말에는 손님이 많다고 했다. 대체로 예약을 하고 온다고. 예약제인지 나는 그 자리에서 알았지만 미리 알았다고 해도 한 명은 예약 자체가 되지 않는다. 한 사람 때문에 모터보트가 출동하기에는 기름값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혼자 카약을 타러 가면 이인 요금을 내야 한다. 사진을 안 찍어도 되니 일인 요금을 내고 타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절대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나저나 옥순봉을 봐야 하는데. 옥순봉을 보기 위해 거기 간 마음은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간 마음과 다르지 않다. 내 마음에 아랑곳없이 바람을 맞을 수도 있는 일. 결정권은 그에게 있으므로. 옥순봉의 허락 여부가 그를 통해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호두과자를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예약 시간표를 클릭했다가 갈지 말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카약을 타는 시간은 삼십 분이지만 옥순봉까지 갔다 오자면 시간이 배나 걸리는데, 그사이 누가 오거나 예약할 수도 있다. 그의 난처함을 이해하기에 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 잡고 잠자코 있다가 말을 덧붙였다. 여기서 타는 게 제일 재밌어요. 카약을 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생의 아름다운 순간이 사무실 벽면과 출입문에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으니.


갑시다.

그가 고민에 잠긴 얼굴을 풀고 옥순봉까지 갔다 오자고 하는 말에 나는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다 벽장으로 가 차곡차곡 포개진 밀짚모자를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써보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구명조끼를 입고 노를 들고 물가로 향할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행복한 기분에 잠긴 그 순간이 잠수한 물속에서 물방울로 피어오르는 숨 같기만 하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


교육을 받고 내가 막 배를 띄워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때 그는 등 뒤에서 목표 지점을 하나씩 제시했다. 나는 그 지점을 향해 가면서 그리고 통과하면서 내가 그저 배에 실려 가는 게 아니라 자력으로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에서 힘이 솟았다. 노를 젓는 내 팔의 힘으로. 걸어갈 때도 다리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니 자기 힘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지만 희열의 강도는 물과 땅의 질감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걸어갈 때와는 달리 카약이 앞으로 나아갈 때 절로 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계속 나아가고 싶은 마음에 쉬지 않고 노를 저었다. 배를 그저 물의 흐름에 내맡겨 두는 여유를 누릴 새 없이.


한 해의 석양이 비치는 시월에 북미 원주민 위시람족이 느리게 가는 카약을 타고 여행하는 것은 해가 저물기 전에 더욱 내달리려는 마음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일까. 제 몸 하나 실은 빈 배를 강물의 흐름에 맞추면서 삶의 리듬을 조율하기 위해서일까. 마른 가지에 기적처럼 돋아난 잎들이 단풍이 들어 이윽고 다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두루 나누기 위해서일까.     



출렁다리 아래를 지나 코너를 돌자 왼편에 옥순대교가 보이고 유람선이 다니는 남한강이었다. 거기서부터 구불구불한 산기슭을 따라 카약을 몰아가면서 경치를 보라고 그가 알려주었다. 다만 유람선이 지나갈 때는 기슭에 바짝 붙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밀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덮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문득 떠올랐다. 홍천에서 물벼락 맞은 일이. 강기슭에 뜬 채 노를 젓지 않고 카약 안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메모하고 있을 때였다. 모터보트가 쌩 지나갔고 그 뒤에 밀려온 파도가 카약 안으로 들이닥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게다가 노트에 쓴 푸른 글자들은 물에 떠내려갔으니. 그가 말한 주의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산기슭을 따라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옥순봉을 향해 가다가 그가 돌담이 있는 그늘 진 곳을 가리켰다. 산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와 식수로 사용했다는 절의 샘터였다. 조금 더 가니 담벼락이 길게 쌓인 절터가 나왔다. 1983년 충주댐 건설로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한 절까지 물이 차올랐으니 평지의 마을은 얼마나 많은 집이 물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산기슭을 따라 옥순봉을 향해 갈 때 청평호의 물은 멍처럼 푸르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옥순봉 일부



돌연 두 개의 둥그렇고 거대한 기둥 같은 바위가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옥순봉이다! 소리를 질렀다. 옆쪽을 올려다보자 삐죽삐죽한 봉우리가 한데 붙어 우람하게 솟아 있었다. 옥순봉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데 측면에서 바라보면 정말 죽순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다. 1548년(명종 3) 단양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단양의 산수를 유람하고 쓴 기문에서 우리가 지금 부르듯이 옥순봉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여러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죽순 같아서 높이가 천백 길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창백하기도 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오르지는 못하겠다. 내가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 때문이다.”

이황, <유람할 만한 단양의 산수에 대한 기문 丹陽山水可遊者續記>     


 

옥순봉



옥순봉을 목격한 순간 절로 입이 벌어지는데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보는 내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말을 잃고 생각을 멈추게 하는 석봉을 고개를 치켜들고 바라보며 장엄한 형상에 그저 감탄사를 흘릴 뿐. 옥순봉 앞에서 옛사람도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고 쓰고 있다. 충주댐 건설로 수면이 높아진 만큼 옥순봉은 낮아졌지만 이황이 이름을 붙일 당시 옥순봉 자락은 지금처럼 물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옥순봉의 높이를 극대화하여 천백 길이라고 한 표현에서 그 위용에 놀란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1722년(경종 2) 옥순봉을 유람한 오원의「청협일기(淸峽日記)」에 따르면 옥순봉 아래에는 발을 디딜 모래사장이 있었다. 오원은 “옥순봉의 뿌리가 흙으로 둘러싸여 있는 게 흠”이라고 적었지만 정말 거대한 옥순이 땅에 심어진 형상이었을 테니 나는 더 신비로운 광경이었을 것만 같다. 그즈음 옥순봉의 모습은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린 김홍도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옥순봉도>



김홍도가 옥순봉을 그린 1796년(정조 20)으로부터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 옥순봉의 자락은 물에 잠겨 있어 그때처럼 발을 디디고 배에서 내릴 수가 없다. 배 안에서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 그는 옥순봉이 예쁘게 보이는 위치를 알려주면서 내게 와서 보라고 했다. 옥순봉의 오른쪽에서 옥순봉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어디서 바라보든 감탄을 자아내는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옥순봉의 장관을 실제 보기 위해 유람이 여의치 않은 경우 그림으로 감상하기도 했는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령 이익이라면.     


萬古琅玕色  오래도록 늘 푸르른 대나무

參差竦百尋  들쭉날쭉 백 길이나 솟았네

誰開七星孔  누가 저기에 칠성공 뚫어서

吹動鳳凰心  젓대 불어 봉황 감동시킬까

이익, <옥순봉도와 입암도에 쓰다 2수 중 옥순봉도[題玉筍峯立巖兩圖 二首]>     


그림 속 거대한 옥순을 보면서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봉황이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 말이다.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봉황을 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진나라 목공의 딸 농옥과 그 남편 소사가 피리를 불면 봉황이 날아와서 모였듯이 돌로 된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한번 불어 보면 그 모습을 드러내려나. “봉황이 천길 높이 날아올랐다가, 빛나는 임금 덕을 보고 내려오누나 [鳳凰翔于千仞兮 覽德輝而下之]”(가의, <굴원을 애도하다 弔屈原>)라는 구절처럼 봉황의 출현 여부는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 그러니 숨어 있는 봉황 같은 인재를 조정에 나오게 하려면 세상에 도가 행해져야 한다. 시인은 그날을 기다린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날을.     



우리가 옥순봉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유람선이 장회에서 청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 선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보이는 봉우리가 옥순봉이고 단구동문이라고 쓴 이황 선생의 글씨가…….”


이황이 단구동문이라고 새긴 지 백칠십여 년 뒤에 그곳을 찾은 오원에 따르면 골짜기 입구의 돌 위에 ‘단구동문(丹丘洞門)’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황이 쓴 글자가 비록 작으나 분별할 수 있었다. 이황이 단구동문이라고 새긴 글자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터보트 위의 그에게 물었다. 그 바위는 수몰되어 다 부서지고 없다고 그가 말했다. 수몰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들을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겨놓았다고 하나 이황의 글씨처럼 사라진 것들은 또 있으리라.


유람선이 지나간 뒤 파도가 밀려와 카약이 출렁이는데 심하게 요동치는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았다. 처음에 재밌어하다가 계속되는 일렁임에 무서워하자 잠시 기다리면 된다고 그가 말했다. 저번에는 유람선이 지나가고 파도가 밀려올 때 노를 저으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왜 기다리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노를 젓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니 물결은 서서히 잠잠해졌다.


이제 돌아갑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쉽사리 카약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쉬움으로. “밥 먹을 때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사는 곳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 된다”(소식, <오잠현 승려의 녹균헌 於潛僧綠筠軒>)라고 한 시인이 있는데 나는 바위 대나무와 오래 마주 앉아 있고 싶다. 옥순의 거대한 침묵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 없는 말이 고요하고 웅장하게 들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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