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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Dec 09. 2024

온통 재수지!

제비봉 탐방로 입산 시간은 두 시까지였다. 시계를 보니 두 시 오 분. 나는 오르기 시작했다. 돌아올 때 버스정류장 매점 주인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지킴이가 그날 오후 일이 있어서 반차를 내었다고. 재수지! 나의 입산 시간을 아는 매점 주인이 말했다.


운 좋게 등산을 시작하고도 나는 서두르지 않고 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느라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눌러쓴 모자 아래 뒷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나를 앞질렀다. 그날 최후의 입산자였다. 한참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가는데도 그와의 간격은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단지 몇 발자국 정도 그가 앞서가고 있었을 뿐.


내가 오르는 방향에서 사람들은 이미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한 산객에게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으니 제비봉이라고 했다. 산을 막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제비봉까지 가볼까 생각했다.

제비봉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이 시간에 제비봉까지 못 가요. 가다가 내려와요. 저만치 가다가 내려와요.

하산하는 이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끝까지 가려다가는 하산하기도 전에 어둠이 먼저 내려올 수 있으니까. 어디까지 가든 한 시간 반 정도 오른 뒤에는 내려올 작정이었다. 다섯 시 십오 분에 제비봉 지킴터에서 단양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니까.


내려가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고 앞을 보니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가던 그가 코너에서 쉬는 건지 나를 기다리는 건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의 바로 앞에 설 때까지.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그가 말을 걸었다.

내가 처음이라고 하자 그는 두 번째 온다고 했다.

가다 보면 저 위에 가파르고 좁은 구간이 있는데 정말 무서워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거기까지 저랑 같이 가요. 거기서 내려오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제비봉까지 갔다 오려고 해요.


그가 말을 걸기 전부터 나는 그 산길에서 한 방향으로 가는 누가 앞에 있는 게 위안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속도 대로 가는 것 같지 않다고 느꼈는데 말을 듣고 보니 나를 염려한 듯했다. 내 뒤에 누가 없으니 자신이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일교차가 심한 데다 추위를 많이 타서 스웨터를 겹쳐 입고 집을 나선 터였다. 산을 오르다 보니 더워 하나를 벗어 가방에 걸쳤는데, 산에서 만난 이들 중 등산화를 신지 않고 등산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제비봉이 바위산이라는 것도 모르고 온 티가 차림새에서 다 드러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제비봉 전망대가 옥순봉과 구담봉이 있는 청풍호를 내려다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카약을 타고 옥순봉에 간 날 카약 체험장 대표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에게 들었다. 산길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전망대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는데 전망대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그 산길 어디든 전망대가 아닌 곳이 없었으니.      





탐방로 입구에서 십 분을 올라가자 탁 트인 전망으로 청풍호가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장회나루와 구담봉이 보이고 오를수록 장회나루 너머 구담봉에 가린 청풍호가 점점 드러났다. 몇 걸음 옮기다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감탄하느라 그 길은 더디게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앞서가던 그가 하늘에 닿은 듯 보이는 계단을 가리켰다. 오를 때 하늘 밖에 안 보여서 천국의 계단이라고들 하는데, 저기 올라가면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고. 그에 비하면 여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마침내 천국의 계단에 이르렀다. 나와 함께 가줘야겠다고 그가 용기를 내도록 한 계단에. 아득히 하늘에 맞닿은 봉우리 꼭대기까지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계단 거의 끝을 향해 오르는 사람을 뒤에서 보니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는 계단을 오르면서 두 번째 오니까 좀 덜 무섭다고 했다.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섭지 않아요?

하나도 안 무서운데요.

산 잘 타네요. 무서움증도 없고.


낯선 곳에서 때로 깨닫곤 한다. 내가 나를 오해했구나 하고. 새로운 자신을 불쑥 만나고서. 그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으로 자신을 정의한다면 오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을 모독하는 것인지 모른다. 저마다 내면에 신비로운 힘이 있으니. 믿는 만큼 발휘되는. 내가 나를 오르는지 계단을 오를수록 조망하는 범위가 넓어지듯 자신도 더 잘 보였다.


마지막 계단 몇 개를 남겨놓고는 떨려서 계단의 손잡이를 꼭 붙잡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점점 하늘로 다가가면서 삶의 끝에 이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할 때 이렇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려나. 떠나기 전에 아득한 세월을 돌아보면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떠나고 싶지 않아서. 수많은 집들을 제 안에 묻은 시퍼런 슬픔을 품고도 아름다운 청풍호처럼.   

  




여기서 보는 게 제일 좋아요.

제비봉까지 갔다가 오는 이들이 말을 남기고 천국의 계단을 내려갔다. 돌아보니 어느 순간 그들이 낯선 곳으로 가고 있었다. 마치 다른 봉우리에 있는 듯했다. 우리가 지나온 길 말고 내려가는 다른 길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저들이 다른 길로 가네요? 우리가 저 길로 왔나요? 하고 앞에 가는 그에게 물었다. 그들이 내려가는 길을 우리는 지나왔다. 내려다보이는 청풍호만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돌아보고서야 새삼 알게 된 것이다.     



맨 마지막 계단까지 오르니 출발한 때로부터 한 시간 십오 분이 지나 있었다. 그는 내게 이제 내려가면 될 것이라고 했다. 저 때문에 괜히 이렇게 오른 거 아니에요? 자신이 동행해서 내가 불편하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워하는 물음을 덧붙이며. 제비봉 등산 초기 그가 내게 제안했을 때의 기분을 말해줄걸. 귀인을 만났구나 한 생각을. 함께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세 시 반에 내려가도 된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제비봉까지 0.5㎞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제비봉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인 것이다.


마지막 계단을 지나니 길은 숲속으로 이어지고 계단을 끝까지 오르도록 바라본 청풍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그가 걸어온 인생길 이야기를 함께 걷고 있었다. 월악산을 여러 경로로 걸어보고 있다는 말에 어떤 계기로 등산하게 되었는지 내가 물으면서부터.


줄곧 해온 소방시설 점검 사업을 아내에게 맡기고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는 인생 역정이며 부드럽게 바뀐 성격과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 등 이야기를 들으며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려 있다가 문득 여태 함께 길을 떠난 나를 내가 혼자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제가 기다리고 있는 데로.)

내가 말을 꺼내려 할 때 그는 십 분 더 걷다가 돌아가자고 말했다. 제비봉까지 갔다가 가려고 했는데,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가 목적을 이루기를 원했다. 그러나 청풍호가 보이지 않으니 더 가는 게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곳에 간 까닭은 옥순봉과 구담봉이 있는 청풍호를 내려다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쉬지 않고 계속 걸어가다 보면 자신이 거기 왜 오르는지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와 헤어져 청풍호가 보이는 계단으로 돌아와서야 나는 제자리를 찾았다고 느꼈다. 남들이 다 가는 정상이라고 해도 자기 마음이 다른 데 끌린다면 거기가 바로 정상일 것이다. 단 한 번 오르는 인생의 산에서도 자기만의 정상을 찾아가는 게 옳으리라.    

  


소나무 위의 까마귀



청풍호를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어디서 날아온 큰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청풍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혼자 앉아 있는 내 그림자인가 싶다가 내가 외로워 보여 내 곁에 앉아주는가 하는 데로 생각이 뻗쳤는데, 간송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오래된 소나무 위  한 마리 학(老松獨鶴)>



소년은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김홍도의 <오래된 소나무 위 한 마리 학(老松獨鶴)>을 올려다보며 노트에 정성스럽게 옮겨 그리고 있었다. 많은 그림 가운데 왜 소나무에 홀로 있는 학 그림을 선택했는지 소년의 마음이 궁금했다. 소년이 엄마의 손을 잡고 전시장을 나설 때 살며시 다가가 물어보았다. 학이 외로워 보여서 같이 있어 주고 싶었다고 소년은 말했다. 아름다운 동행이구나! 소년의 대답을 듣고 놀라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까마귀에게 했다.


저 위에 혼자 가기 무서운 구간이 있는데 거기까지 저랑 같이 가요. 그날 산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말했듯이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다정한 누가 도움을 주기 위해 다가온다. 어느 길목에서 만나 어느 길목까지 동행하며 이어지는 삶. 내가 그날 들은 어투로 말해보자면 재수지! 설령 인연들로 인해 괴로움을 겪을지라도 그마저 성숙의 기회이니 재수지!


내려오는데 뒤에서 뭔가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내가 한쪽 가방끈에 걸어 둔 스웨터가 잔가지에 걸려 있었다. 올라갈 때 동행한 그가 옷을 가방에 넣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나는 가방에 들어갈 공간이 없다고 넣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올이 풀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어둠이 다가오는 기척이 나는데 돌아보고 돌아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곧 도착할 참이었다. 한 청년이 허겁지겁 내려와 제비봉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버스 갔어요? 하고 물었다. 청년은 제비봉까지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제비봉에서 뭐가 보이던가요?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 계단에서 더 잘 보이죠.

청년이 말했다.

우리가 버스에 타려고 할 때 그날의 동행자가 막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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