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학술 포럼 장소인 여성회관으로 가니 접수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양장본 두어 권을 비롯하여 다섯 종류의 책이 쌓여 있었다. 책을 뒤적거리자 필요하면 가지고 가라고 안내자가 말했다.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장릉사보(莊陵史補)』와 영월 사적지의 현판을 모은 『영월의 현판』 등 본 적 없는 중요한 책을. 영월 여행 중 들린 그곳에서 말 그대로 깜짝 선물을 받았다.
포럼이 끝난 뒤 나갈 때 가져갈까 싶었지만 종류별로 단지 몇 권씩 남아 있을 뿐이었다. 참석자 모두 그 책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일단 챙기고 볼 일이었다. 책 네 권을 포개어 가슴에 안으니 목 밑까지 올라왔다. 판형이 큰 책을 가방에 넣을 수도 없고, 무거워 들고 다닐 수도 없지만 다음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디 보관할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책 위에 얼굴을 올리고 강당에 들어서다가 놀라 책을 바닥에 쏟을 뻔했다. 포럼 장소로 향하면서도 지역 축제 학술 포럼에 올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 했는데 빈자리가 드물었다. 자리마다 앉아 있는 연세 지긋한 어른들. 단종 축제에 온 여행객 같지는 않고 영월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단종에 대한 영월인의 관심의 정도를 그 순간에 알게 되었다고 할까.
영월 어른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방청객에게 질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이다. 발표자는『세조실록』에 근거해 단종이 청령포에 온 시기를 1457년(세조 3)으로 보았으나 한 어른은 1456년(세조 2)으로 정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근거로 남다른 주장을 하는 것일까? 단종에 대한 기록인 『노릉지』, 『장릉지』, 『장릉사보』 등에는 『세조실록』과 달리 단종이 영월에 온 시기가 1456년으로 되어 있다. 만약 『세조실록』에 따라 단종이 1457년 유월 청령포에 와서 시월에 관풍헌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면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 시름겨워 지은 단종의 작품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詩)>는 존재할 수가 없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 때 자주 오르던 ‘매죽루(梅竹樓)’에서 지은 작품으로 인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子規樓)’로 바뀌지 않았는가. 역사 연구를 함에 정사를 근거로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단종의 사실에 관해서라면 『세조실록』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어른은 덧붙였다.
옛 기록을 찾아보니 “자신이 살아온 한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정리했다”(신병주)라고 평가되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어른이 말한 그대로 기술되어 있었다.
“<자규시>와 날이 가물어서 비를 빈 두 가지 일로 참작하여 보면, 영월로 옮긴 것은 이미 정축년(1457) 봄 전이 분명하다. 「현릉지문(顯陵誌文)」을 근거로 금성대군의 집으로 나간 것과 영월로 옮긴 사실을 병자년(1456)에 실어 둔다. 『세조실록』에는 두 가지 일을 모두 정축년에 실어 놓았는데, 음애(陰崖) 이자(李耔)가 말하기를 이것은 특히 여우와 쥐 같은 무리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기록이다. 후일 실록을 편찬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니, 실록을 모두 믿을 수는 없다고 했다.”『노릉지』 (이긍익, 『연려실기술』4권)
이긍익이 인용한 『노릉지』에는 단종이 영월로 물러나 있을 때 『세조실록』의 기록과 그 외의 다른 기록의 상이점을 언급하면서 『세조실록』에 실린 단종에 대한 사실은 믿을 수 없다는 이자의 기록도 붙어 있다. 역사를 기술할 때 왕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의리에 위배가 된다고 여겼으므로 사관이 노산군에 대한 일을 『세조실록』에 사실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타당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긍익이 인용한 『노릉지』는 어떤 책인가?『노릉지』는 1660년(현종 1) 영월 군수로 부임한 윤순거가 단종의 사적에 대한 야사의 기록을 수집하여 단종이 쫓겨난 전말과 당시 노릉의 관리 상황과 육신 등의 행적을 서술하여 편찬한 책이다. 송시열은 『노릉지』를 비록 권람ㆍ한명회ㆍ정인지ㆍ신숙주 등이 보더라도 성내어 화를 입힐 마음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송시열, <노릉지 발문 [魯陵志跋]>) 1679년(숙종 5) 윤휴의 청으로 숙종이 『노릉지』를 열람했으니 이 책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하겠다. 이를 통해 1698년(숙종 24) 단종의 복위가 성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사에 대한 유감을 숙종은 시로 드러내기도 했다.
遜位冲齡日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주고
遙臨僻邑時 멀리 외진 고을로 이어하셨네
適然丁否運 공교롭게도 불운을 만났으나
君德曾無虧 임금의 덕에 흠이라곤 없었네
숙종, <노산군의 일에 대한 유감 네 수 중 첫째 수 [魯山事有感四首·其一]>
관풍헌(觀風軒)과 약사전(藥師殿)
『노릉지』를 토대로 한『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종합하면, 단종은 1456년 6월 청령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재로 인해 영월 객사의 동헌인 관풍헌으로 옮겼다. 그 후 1457년 10월 24일 죽을 때까지 일 년이 넘는 기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포럼에 참석하기 전 나는 관풍헌에 갔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관풍헌 옆 건물 현판이 ‘약사전(藥師殿)’으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약사전이라면 절에 있어야 마땅한 불전이 아닌가. 객사에 왜 약사전 현판이 달려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포럼이 끝나고 강당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 의문점을 잊고 있었다. 알만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한 생각조차도. 책을 챙기면서 보니 어른은 질의 시간에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발표자에게 다가가 메일로 보내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른의 지적을 발표자는 수긍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야말로 제대로 알고 있다고 느꼈다. 그랬기 때문인지 주의는 계속 그에게로 쏠렸으나 발걸음은 무의식중에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 밖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발걸음을 돌렸다. 객사의 현판에 대해 그 어른에게 한번 물어보자는 생각이 그때 든 것이다.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고 혼자 있는 어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선한 눈빛과 웃는 인상 덕분에 그를 처음 마주하고도 마음이 편했다. 그때 내 손에 메모장이 들려 있었다. 어른은 거기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약사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의 본래 이름은 ‘내성관(奈城館)’이다. 내성은 영월의 옛 이름으로 조선시대 객사는 그 고을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고 했다. 내성관의 우측은 관풍헌(觀風軒)이고, 좌측은 망경헌(望京軒)이다. 듣고 보니 세 채의 건물 가운데 현판이 제대로 달린 것은 관풍헌뿐이었다. 망경헌은 아예 현판이 없었으니까. 그림으로 그린 건물에 이름을 붙여가며 설명이 막 시작되었는데, 안내자가 다가와 문을 닫는다고 했다. 포럼 참석자들은 이미 다 돌아가고 우리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무거운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포개어진 책을 다시 안는 순간 우체국으로 가서 집으로 보내면 홀가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사무실이 우체국 근처에 있다고 해서 차를 얻어 타고 가보니 우체국 문이 닫혀 있는 게 아닌가. 막 다섯 시가 지났는데? 왜 벌써 문을 닫았지? 우리는 서로 혼잣말인 듯하고 있었다. 토요일인 줄도 모르고.
하는 수 없이 책을 차의 뒷좌석에 그대로 둔 채 설명을 마저 듣기 위해 어른을 따라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건물 화단에는 흰 철쭉이 봄 햇살을 받고 있었다. 아, 예쁘다. 어른이 꽃에 눈길을 주며 감탄했다. 매일 보는 꽃일 테지만. 볼 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남자 어른의 모습에 나는 철쭉을 볼 때보다 더 환한 빛이 마음 안에 퍼지고 있었다.
3층에 있는 사무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쯤에선가 어른은 난간을 잡고 천천히 올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라고 하며. 몸의 변화에 스스로 당혹스러워하는 말에 나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조심하세요 라는 말밖에는. 그러자 어른이 내게 물었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아요? 맑은 목소리, 아나운서 같은 발음, 꼿꼿한 자세 등으로 내가 나이를 가늠해 보는 사이 어른은 말했다. 팔십셋이라고.
나이에 놀란 까닭은 열정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내가 포럼에서 얻은 책 중의 한 권을 번역한 분으로 단종의 문화 유적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였다. 선생은 지역 사람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해주고 있다고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이 줄지어 있는 강의실이었다. 내가 누군지 묻지도 않은 채 연구실도 보여주었다. 공간과 시간을 낯선 이에게 선뜻 내어주어 마주 앉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맨 앞줄에 앉아 질의하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도, 로비에서 내가 그에게 질문할 때만 해도.
선생은 율무차도 타주고 갈 때 가져가라고 땅콩사탕도 한 움큼 쥐여 주었다. 나도 뭔가 나눌 게 없나 생각하자 문득 배가 떠올랐다. 내 두 손으로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큰 배가 가방에 있었다. 껍질째 먹기 좋은 한 알의 사과라면 몰라도 여행자의 가방 안에 배가? 한 손에 쥐고 먹지도 못할 배를 내가 준비했을 리가 있나. 책과 마찬가지로 배 역시 영월에서 받은 선물이다.
단종 제향과 별도로 충신 268인의 제향을 모셨는데 마치고 난 뒤에 배식단에 올린 과일이며 떡을 제관이 관람객에게 나눠주었다. 내년에도 오세요! 라고 하면서. 얼떨결에 배와 떡과 대추 등을 두 손에 받아 들고 장릉으로 오르는 길에 내려오는 한 아주머니를 만나고는 얻은 떡과 대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음복까지 하는 놀라운 즐거움을.
과도가 없으니 배는 영월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선생이 건네준 과도로 배까지 깎아 놓으니 우리 앞에 한 상의 다과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방금 만난 어른과 다과를 하는 상황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어디서 이어진 인연의 실이 마침내 내게 닿았듯이 선생의 입에서 내가 들어야 할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중단된 데서부터.
세 채의 건물 중 가운데 있는 내성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궐패)를 봉안하고 배례를 행하는 장소이다. 지방관이 부임하면 이곳에서 배례를 올리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행한다. 동헌인 관풍헌은 중앙에서 파견된 문관이 왔을 때 묵는 곳이고, 서헌인 망경헌은 무관이 왔을 때 묵는 곳이다. 이처럼 객사는 왕권을 상징하는 동시에 중앙 관리의 숙소로 사용된 공간이다.
그런데 영월 객사의 내성관은 어찌하여 약사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것일까? 선생은 1953년 중학교 1학년 때 내성관이 이미 보덕사의 약사전이 되어 있었고, 출입문인 외삼문에는 포교당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육이오 때 학교가 불타서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공부했는데 영월 객사가 그중 한 곳이었다고. 대부분의 객사는 일제 식민지정책에 따라 건물이 다른 목적으로 쓰여 없어지고 현존하는 객사는 몇 곳 되지 않는데, 영월 객사의 경우 ‘내성관’이라는 본래 이름마저 잊힌 실정이라고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월중도(越中圖)』의 <읍치도(邑治圖)>
영월 객사 가운데 내성관은 전패를 봉안한 만큼 위계가 가장 높다고 말하면서 『월중도(越中圖)』를 보여주었다. 정조는 박팽년의 9대손 박기정을 영월 부사로 보내 단종 유적지를 정비를 하게 했는데 『월중도』는 정조에게 보고용으로 제작한 화첩이다. 선생이 말한 대로 『월중도』의 <읍치도(邑治圖)>에는 객사가 정중앙에 자리하고 기둥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영월 객사를 보덕사가 점유하게 된 것일까? 연구 논문에 따르면 1907년 고종은 전국의 객사 건물을 교육기관으로 전용하도록 칙령을 반포한다. 고종의 칙령의 배경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방 객사의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통감부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권을 상실하면서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망궐례를 중지시킨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조순자, 「조선시대 객사 행례와 안성망궐례 재현」)
영월 객사가 보덕사의 차지가 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종이 칙령을 내린 즈음부터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문화유산인 영월 객사 정청의 이름이 내성관이고, 서헌의 이름이 망경헌인 줄 그곳에 다녀오고도 몰랐다. 일제 식민지의 잔재로. 이름을 잃고 영월 객사는 지금 그 자리에 있다. 언제 제 이름을 불러주게 될까.
시간은 어느덧 여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선생의 환대에 감사한 마음으로 저녁을 사려고 하자 밥을 해놓고 식구가 기다린다고 했다. 선생은 밤의 축제가 펼쳐지는 동강 둔치로 나를 태워다 주면서 주요 유적지, 공공건물, 시장의 위치를 하나하나 알려주며 영월 읍내를 부러 한 바퀴 돌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전개된 하루. 음복이며 책 선물에 선생과의 인연까지.
내 계획으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찾아오는 길을 생각하며 동강 가의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천막 안에 펼쳐진 영월로. 입구에 자리한 한반도면을 지나 무릉도원면에서 배회하다가 술이 솟는 샘[酒泉]이라는 뜻을 가진 주천면에 앉을까 망설이며 두리번거리는 순간 김삿갓면을 발견하고 멈출 때까지. 한반도, 무릉도원, 주천, 김삿갓 등 영월 땅에 붙은 아름다운 이름을 속으로 하나씩 불러보다가 제 이름을 되찾지 못한 것들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