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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Jul 17. 2024

옛날옛적 빠리엔 멋진 파리지엔느가 있었더랬지! 2

-프랑스 빠리에서 7월 26일 올림픽 개막식이 열릴 예정입니다만.....

[대문사진] 프랑스 빠리 오페라 거리, 정면 중앙은 건축 공모전에 당선된 '샤를르 갸르니에' 작품 오페라 극장

 나폴레옹 3세 집정기 오스만 빠리 시장은 도시를 재정비한다. 이 시기 건축을 '오스만 양식' 이라 한다.



7월 16일 <옛날옛적 프랑스 빠리엔 멋진 빠리지엔느가 있었더랬지!>에 예전에 기록한 사진들을 더 넣고 글도 수정해서 싣습니다. 어제 두서 없이 쓴 스산하고 슬픈 마음에 공감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빠리는 올림픽 준비로 도시 전체가 정비되고, 통제되며 손님맞이 단장 중입니다. 내일 18일부터 26일까지는 일부 거리와 지하철 역들과 광장 등이 통제될 것입니다.


국제도시니 만큼 행사때문에 이런 일들을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그저 일상이려니 하고 넘겼는데 이제는 브런치 스토리에 빠리 이야기를 올려야 할 듯 싶습니다.


미국 3대 대통령이었고, 빠리 주재 대사였던 토마스 제퍼슨은 빠리를 제 2의 고향이라 했다던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제 고향 서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도 공간이동을 할 때면 빠리가 그리워지기  때문이지요!


제가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사랑했던 빠리 골목 골목, 단아한 건축물 한 곳 한 곳, 수없이 자리하고 있는 고즈넉한 카페와 브라스리 그리고 광장들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사진들과 함께요!


제가 살아온 자취이고 제가 사랑했던 도시, 사랑하는 공간이니까요! 제 젊음과 청춘이 다 녹아있고, 열정과 회환 그리고 혼신이 스며든 이 곳 빠리와 프랑스에 대해 써야 할 듯 싶습니다.


언젠가 가 사라져도 기록처럼 추억처럼 슬픔과 열정 스민 독백처럼 남길 바라면서요! 아니면 그 흔한 여행 가이드 수첩처럼 말이지요! 이제 이따금씩이라도 '나 혼자 풀어내는 빠리와 프랑스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래! 예전 빠리가 좋았어. 그렇지?

구글지도나 여행객들, 유투버들과 브

천쳐들이 소개하는 빠리는  평면일 뿐!

어제 빠리 6구 길을 걷는데 내 바로 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내 귀를 타고 들어오는 목소리톤은 서울 말씨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늘 말하던 서울 사대문 안 서울토박이 말씨였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 대부분은 스스로 서울이 원적 고향이라고 말씀하시던 분들이었는데 내 뒤에서 들려오는 억양이 딱 그 말씨였다.


"그래, 옛날이 좋았어. 그렇 않니?"


"그으! 예전 빠리가 그립지......"


그런 말투로 자분자분 말하는 사람이 궁금해서 뒤 돌아보니 자그마한 체구에 두 분 다 머리가 짧고 흰 빛이었다. 60대 후반정도로 보였다.  빠리에 사시는 분들인 듯싶은데 모습으로 보나 어투로 보아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유학 오신 분들 같았다.  


그 근처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블랑제리(빵집)가 있으니 아마도 거기에 왔을 수도 있겠다. 한국인이 하는 곳은 프랑스에서 맛있는 빵을 만든다고  상을 받은 맛집이다. 이젠 점심시간이면 젊은 파리지엥(빠리에 사는 남자), 파리지엔느(빠리에 사는 여자)들이 줄을 설 만큼 유명해졌다.



프랑스 빠리 시청! 1년 내내 각종 행사가 많은 시청 광장은 역사적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다. 그 해 2012년에도 행사기간 중!


내가 처음 프랑스 빠리에 왔던 때와
여러 상황이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내가 프랑스 왔을 때 나는 학생 신분이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학생 체류증으로 지내다가 갖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작가 체류증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작가 신분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무엇이든,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레지당뜨' 10년짜리 영주권을 받기까지 내 젊음, 내 청춘(같은 의미일 것 같아도 좀 다르다.) 다 소진되었던 듯 싶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들이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체류증을 받는 것이 힘들듯이 프랑스에서도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수없이 심사를 거쳐야하며  엄청나게 까다롭고 힘들다. 나 같은 경우는 우직하고 성실하게 적지 않은 세금과 분기별 분담금을 내면서 당당하게 영주권을 받았다.


어학은 6개월 미만이지만 대학 이상은 1년짜리 체류증을 받는다. 한 해 한 해  갱신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던지!


학생 체류증은 빠리 15구에서 담당한다. 집 전기세 은행 송금 증명서, 잔고증명서,학업관련 교수가 허가해주는 편지,  각종 보험증명서 등등. 학생 체류증 받는 것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 서류 중 조금이라도 허술하거나 틈새가 감지되면 가차없이 연장불가다.  학생이  학업 후에 학위를 받으면 15구와는 작별하고, 자기나라로 귀국해야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다른 자격으로 체류증을 신청해서 받으려면 시테섬에 빠리 경찰청으로 가야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시테 섬에 자리하기에 나는 경찰청에서 체류증을 받는 날이면 성당에 들어가 묵상하며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다.


대화재 전 프랑스 빠리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 중세 고딕양식 정면, 첨탑과 오른쪽 종탑에 15톤 엠마누엘 종이 있었다.


끔찍했던 2019년 4월 15일 대화재 이전에 고즈넉한 노트르담 대성당. 요한 23세 정원에서 바라본 첨탑과 성당


학생 체류증에서 일반 자격으로 변경하려면 무척 까다롭고 힘들다. 2004~5년 전후로 학위를 받은 사람은 본국으로 귀국해야하는 규제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스타튀(Statut)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직장인으로 받는 살라리에 체류증이 있고 상업 비자로 얻는 체류증이 있다. 프랑스 남자건 한국 남자건 체류증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얻는 동반자 체류증이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 남자도 마찬가지다.또는 아이를 낳거나 아이가 있는 경우에도 아이엄마는 보호자 자격으로 얻는 체류증이 있다. 


내가 아는 한국인 지인은 오래전에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잘 살고있다. 그럼에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은 10년짜리 레지당뜨를 받는다고 했다.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고해서 국적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맞는 생각이다..


예술가나 작가 자격을 얻기 위해 각각의 기관에 등록을 하고, 엄청난 세금 신고를 하면서 받는 작가 혹은 예술가 체류증이 있는데 이것도 1년마다 갱신해야 한다.


빠리 시테섬 경찰청에 가서 온갖 증명서 8가지 이상 서류를 내고, 6년 이상 세금신고가 제대로 된 사람만이 신청할 수 있는 것이 남성은 <레지당>이라 하고, 여성은<레지당뜨>라 부르는 영주권이다.


신청해도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심사받고 안 되는 경우도 많다. 겨우 심사통과해서 받는 '증'이 바로 10년짜리 거주증이다. 소위 말해서 영주권이다. 어디에서건 무슨 일이건 할 수 있고, '롱그 뒤레' 장기간 거주할 수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처음 그 레지당뜨를 받았을 때  화재 나기 이전이므로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어가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성당 성물가게에서 나무로 만든 성모자상 성물을 사서 잘 모셔두고 있다.



빠리 5구 무프타르 거리 근처, 벽에 그림과 시, 이브 본느후아의 시가 나무 등대 같다.


나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이렇게 조용히 있지만 한 때 빠리와 프랑스 전역, 유럽을 힘차고 자유롭게 다녔었다. 빠리의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그때는 오직 문학과 예술에 관한 생각 밖에 없었다.


아울러 생활하고 체류할 때 필요한 경제적 수입원체류증에 대한 생각이 늘 따라 다녔다. 매년 갱신해야하는 학생 체류증에 교수 싸인이 없으면 안 되므로 수업도 열심히 들어야 했다.


아울러 살아나가야 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난관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예술의 도시, 빠리에 왔다는 기쁨, 내가 전공한 학문의 실체인 본토 왔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내가 빠리에 처음 와서 눈물 그렁대는 눈으로 바라본 빠리 하늘은 늘 횟빛이었다. 그 하늘을 보며 나는 되뇌었었다.

'Je suis à Paris!. Je suis à Paris!" 나는 빠리에 있어. 나는 빠리에 있는 거야!


그렇게 외롭고 낯설고 모든 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프랑스에 와서 유학생활을 견뎌낸다는 것이, 내 힘으로 일해서 체류증을 받고, 내 열정과 에너지로 당당한 영주권자가 된 것이!


돌이켜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혈을 토해내듯, 누에가 실타래를 자아내듯이 시간을 갖고 써야할 필요가 있겠다.


아마 그 단아한 두 어르신도 나처럼 생각하겠지! 구글 지도를 보면서, 유투버나 블로거 혹은 브런쳐들도 너도 나도 여행와서 사진찍어 올리는 그것만이 빠리가 아니란 것을, 외형으로 보는 빠리만이 다가 아니란 것을!


이젠 워킹 홀리데이인가 하는 제도로도 프랑스 빠리에 많이 와 있고, 회사 주재원과 가족으로 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오는데 그 어르신들 말마따나 30년 전, 40년전 그 분위기가 거의 사라지고, 그저 왁작지껄! 어느 새 프랑스 인들조차도 스노비즘에 젖어 버린듯 하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이젠 카페에서 신문 보거나 책 읽는 파리지엥  파리지엔느 모습을 찾기 어렵다.(그래도 아직 빠리엔 카페나 지하철에서 책읽는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이 없었어도
 구글 지도가 없었어도

예전 빠리가 좋았지,
그래 옛날이 좋았지!



니들이 아니?
예전 빠리를 어떻게 알겠어?
그 시절엔 말야, 그래도 낭만이 있었거든.

그 형이상학적인 분위기와
인류와 세계에 대해 고민하는 진지함과
철학과 사유의 기둥이
다 허물어졌단 말이지!

이젠 그저 와서 먹고 사진 찍고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시끄럽고 혼탁한 빠리로 전락했단 말이지.

그렇게 한번 휙 스캔하듯 둘러보곤
시니컬하게 말하는 거야.

"빠리 별 것 아니네."

얼마나 소름끼치고 무지한 말이람!


예전에 빠리엔 샹송이 흘렀지!
시와 그림 예술이 늘 함께 했고
골목과 거리 곳곳에 낭만이 스며있었거든.

이젠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 카메라와 메모장에
끄적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잖니?


예전이 좋았어! 아무렴!
예전 빠리가 운치있었지!
그땐 멋진 빠리지엥과 빠리지엔느가 있었더랬지!







프랑스 빠리, 에펠탑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은 샹 드 마르스, 그리고 유리로 된 평화의 문에 각 나라 언어로 평화가 씌어있다. 한글로도 평화! 그립다! 평화야! 내게 어서 와 주렴!


다시는 이 풍경을 볼 수 없음에 전율한다. 대화재로 몇 년 째 복원하므로 새롭게 지어지겠지만 같은 모습은 아니니까! 내 마음에 노트르담 대성당 파이프 오르간 선율이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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