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 목표
유학생들은 보통 두 부류로 나눠진다(내 기준)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는 부류와
기만 더럽게 세지는 부류가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이름이 문제였을까. 내 이름은 순우리말이다. 그래서 중국에 처음 갔을 때 한자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다. 보통 이런 경우 음역(音譯)한다. 그런데 나는 내 이름과 비슷한 뜻의 한자로 이름을 지었고, 그 이름이 마치 철수나 영희처럼 스탠더드한 나머지 오히려 보기 드문 그런 이름이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내 성이었던 것 같다. 이 씨였으면 어찌어찌 묻어갔을 텐데 나는 박 씨였고, 그 결과 내 이름은 우리나라로 치면 나까무라 철수처럼 요상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학기 초만 되면 선생님들이 출석부를 보고 도대체 나까무라 철수가 누구야? 했다. 덕분에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고 끔찍했다.
당시 쟤랑 같은 조 하기 싫다고 우는 애도 있었고(통곡함), 굳이 굳이 찾아와서 왜 반 평균을 깎아먹냐고 하는 놈(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냐고), 내가 한마디라도 하면 발음이 웃기다고 배꼽 잡고 뒤집어지는 불량학생(?) 무리도 있었다(심지어 수업 시간인데 선생님이 말리지도 않음...).
어릴 때 사촌오빠 배 위에 쿠션을 올려놓고 그 위에서 방방 뛴 적이 있다(인간 트램펄린). 사촌오빠가 너무 행복하게 웃어서 그만 뛰고 싶은데도 계속 뛰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촌오빠는 무서우면 웃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만하라고 하지 왜 웃어하면서 정말 미안했던 기억인데, 음…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 그러니까 나는 무서우면 화를 낸다. 사람마다 두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이렇게 다르다. 아닌데? 나는 상처 안 받았는데? 그쯤은 우스운데? 전혀 타격 없는데? 하고 상대방의 당황한 표정을 봐야 직성이 풀렸다.
여기서 더 최악인 건 부모님이 정의로움을 강요(?)하는 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강강약약’을 실천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싸울 때 비겁하게 굴지 말고 정말 잘못한 놈, 제일 센 놈과 싸우라고 배웠다. 휴… 나는 또 배운 대로 하는 스타일이라…
우는 여자애, 시비 거는 남자애, 불량학생 무리 중에서 불량학생들과 싸웠다. 그리고 배운 대로 그중 제일 센 놈과 싸웠다.
사실 어찌 보면 직접적인 가해(?)는 제일 적게 한 애였다. 항상 얘가 좀 피식하면 옆에 있던 놈들이 자지러지는 식이었는데 어쨌든 나는 콕 집어서 녀석과 싸웠고 당시에는 그게 가장 부끄럽지 않고 정당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cm가 넘는 거구의 체육특기생과 싸웠고 (사실 싸웠다기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호통치고 훈계질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걔가 사과하고 끝났다(지금 보니 인성갑… 정말 다이다이 떴으면 지금 이 글 쓰고 있지 못했을 거다).
그 후 학교 생활은 정말 편해졌다. 한 번 미친년이라고 소문이 나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난리를 친 이유는 어이없겠지만 정말로 무서워서 그랬다. 나는 내가 한 번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나는 위인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무섭고, 앞이 캄캄하고, 기대고 싶고. 이런 감정이 들면 있는 힘껏 외면했고, 죽는 일이 있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나약함을 내보였을 때 내 곁에 남아있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다.
좀 쪽팔리지만 이 시기에 매일밤 눈물로 지새웠다. 학교에서는 개지랄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 밑까지 가라앉았다(이중인격…?). 만성 불면증도 이때 생긴 것 같다. 불안함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시 학교 갈 시간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안 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고, 공부는 성과가 빨리 나오는 편이었으니… 그걸로 만족감을 얻으면서 버텼다.
내가 매 순간 느끼는 이 불안감은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해 보면 아마 안정감과 소속감의 부재에서 오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 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담임을 모두 겪었고 진로도 미국 대학을 간다 했다 중국 대학을 간다 했다가… 유동성이 큰 환경에서 자랐다. 또 중국 유학하면서는 내내 외국인이었는데, 귀국하고 나니 중국에서 온 애가 되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나는 꼭 뿌리를 깊게 뻗지 못한 채 자라 버린 나무 같았다. 어느새 몸집이 너무 커져 버려서 다들 내가 얼마나 쉽게 쓰러질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흔들기 전에 제법 그럴싸하게 단단한 척하는 것이 나의 생존방식이었다.
작년에 취업을 실패하고 방황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면탈 통보를 받자마자 위기감에 내 눈에 보이는 인턴직은 모두 서류를 넣었고 닥치는 대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정말 운 좋게 현재의 직장을 다니게 됐다(바쁜 벌꿀은 정말 슬퍼할 시간도 없더라).
그런데 이 시기에 내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친구가 나에게 상처되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심지어 그 친구에게만 말한 내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하기도 하고… 이해가 안 갔다. 나는 누가 봐도 좋지 않은 상황인데 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와중에도 너무 괜찮은 척했다. 나 역시 사촌 오빠가 웃었을 때 더 방방 뛰었던 것처럼 내가 견뎌낼 때마다 그 친구도 더 세게 말했던 것 같다. 사실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상태를, 감정을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내 자존심에는 막막하다 슬프다 같은 말은 도통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센 척하느라 사람들 상처 주는 화법도 한 몫했구나 싶었다. 남이 10을 공격하면 100으로 돌려주는 이놈의 성질머리가 문제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10만큼 상처받지 않는 것일 뿐인데… 그럴 땐 솔직하게 그대로 말해도 될 텐데, 내가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게 나 삐짐! 흥! 하는 것 같아서 너무… 부끄럽다. 항상 난 이미 상처받았으니까 한술 더 뜨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동안 나는 맞서 싸웠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공부도 좋아서보다 열받아서 함).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환경도, 내 나이도 많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옛날의 방식대로 싸우려 들고, 내 멋대로 굴고 있었다. 지금과 맞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작년 말, 모 공채의 고차 전형까지 갔다. 이번에는 정말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마지막 관문을 남겨두고 떨어졌다.
그동안 결과가 나와도 주위 사람한테 굳이 연락을 안 했다. 합격이면 내가 너무 들뜰까 봐 혹여나 불합한 사람이 속상할까 봐, 불합이면 뭐 좋은 일이라고 얘기하나 싶어서.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전가해서 좋을 건 뭐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내가 오랫동안 연락이 없으면 아 떨어졌구나 짐작만 하고 내가 마음 추스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다.
근데 내가 뭐라고 내 친구들은 내가 청승 떠는 것까지 기다려 줘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매번 혼자서 땅굴 파고 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징징댔다
물론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친구랑 만나서 한두 번 징징대고 나니까 더 할 말이 없었다.
근데 무엇보다 매일 야근하느라 죽어나가면서도 토요일 아침을 기꺼이 내어주는 언니가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기죽지 말라고 주위의 각종 대기만성형 사례를 쉬지 않고 얘기해 주는 언니가 사랑스러웠다.
이런 친구도 있는데 슬플 게 뭐가 있지? 싶어서 이번엔 정말 여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그동안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주위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내 나약함을 조금은 드러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고 있다.
주위에 간지러운 말도 해보고, 좀 더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는 게 나의 새해 목표다.
+브런치 업로드가 끊긴 것도 저쯤이었다… 나와의 약속이자 다른 작가님들과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편하지 않았다.
새해에는 다시 글을 꾸준히 올리려고 했는데
연초부터 여러 일이 많아서 시간이 잘 안 났다…
그래도 항상 브런치에는 솔직하지 못한 내가 가장 솔직한 글을 쓰게 된다. 비밀 일기장 같다고 해야 하나. 앞으로 짧게라도 글을 자주 남겨보도록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