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문득 남편이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니 한 집에서 같이 재택 하는데 왜 꼭 문자로 보내죠?) 안 그래도 백남준 전시회가 열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매번 가야지 하면서도 미루고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꼭 가보자며 길을 나섰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곳은 시티홀(City Hall) 역에 위치한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Singapore National Gallery)입니다. 주말인 데다 며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코로나 완화 조치 발표가 있었던 탓인지 지하철 역부터 갤러리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입니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은 지하 1층, 3층 싱텔(Singtel; 싱가포르 대표 통신사) 특별 전시관 2곳에서 전시 중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그의 작품이 이렇게 전 세계를 돌며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중 하나는 살아가는 동안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돈과 재테크, 조기 은퇴 등 물질적인 것을 쫓고 그것의 달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모습입니다. (네, 저도 그중 한 명이겠네요.) 하지만 작품들을 보며 생각한 것은 결국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돈이나 (물질적인) 유산보다도 이런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존속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꼭 거창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삶을 살아가는데 지녀야 할 '기본', '정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한 '글' 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하고 있는 꾸준한 글쓰기가 아이와 가족들, 그리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그것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여유로운 삶과 여가입니다.
싱가포르는 한국보다도 교육열이 무척이나 심해 주말이면 이곳, 저곳의 학원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쁜 부모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평일보다도 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아이나 부모 모두 지치기도 하는데요.
파이어족들은 보통 자기 주도 학습을 시키며 부모가 아이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가족이 함께 여가 생활을 하고는 합니다. 운동이나 산책, 문화생활을 함께 즐기는 것이지요.
이 전시회도 그런 맥락에서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여가 생활의 일부분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사실 저희도 아이와 함께 하는 오랜만의 문화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차분하게 전시를 둘러보고 이것, 저것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는 아이를 보니 뿌듯하면서도 감격스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이가 참~ 많이 컸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극성스러운 사교육도 대단한 유산도 아닌 바로 이런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생활은 사실 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의 경우에는 무료였고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입니다. 함께 좋은 것을 보고 서로 나누는 마음, 함께 하는 중에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 그것이 파이어족의 삶이고 마음가짐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파이어족은 은퇴 여부나 자산의 규모보다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우선하는 가치가 무엇인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아... 어쩐지 콩국수 때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흘러가네요.)
아직 파이어족을 달성한 것도, 조기 은퇴를 한 것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추구하고 싶은 것은 '함께 하는 삶', 그리고 '삶의 가치를 생각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지금의 시간과 같이 소소하지만 여유로운 일상의 단면들이 켜켜이 쌓여나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