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금고
햇살이 쪼개진다. 눈이 부시다. 손날로 햇빛을 막으며 창밖을 본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줄공책처럼 볏짚만 가지런하다. 원래 내 것도 아니었건만 마치 내 것을 다 거둬간 듯 헛헛한 마음이 든다.
눈부신 햇살을 등지고 책상 앞에 앉았다.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말이 많아지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실수가 있으면 후회를 한다. 후회를 하면 돌리고 싶어 진다. 돌리려 다시 말을 하면 변명이 된다. 변명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이 한심해진다. 한심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낀다. 아껴둔 말을 글로 쓰고 싶은 욕구, 내 안에 담아둔 말들을 글로 써내는 일, 소심한 나는 그런 이유로 글을 쓰면서 작가를 꿈꾸고 있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만남은 불편했다. 연말이면 연봉 협상을 하고 높은 보너스를 받아서 어떻게 쓸까?를 고민하는 두 친구의 대화에서 소외된 나를 본다. 전업주부인 나는 경제활동에서 이렇게 무작정 쉬고 있어도 될까?라는 초조한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20대 후반 결혼이라는 출발선은 같았으나 부동산과 주식으로 경제적인 부를 얻은 친구들은 40대 중반이 된 지금 좁혀지지 않을 거리에 서 있다. 친구들은 시류에 잘 편승해 자산을 늘린 자신들의 안목에 자긍심을 갖는다고 했다.
‘잘 산다’는 기준이 경제적인 여유와 상관관계에 있다는 불편한 현실 앞에서 나는 그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편이었다. 과녁을 겨냥하고 날린 화살을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날린다.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의례히 있는 스트레스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린 나름대로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잘 산다’는 기준을 경제적인 것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말자고, 욕심을 내려놓으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명중시키지 못한 화살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남편은 나를 또 속물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편의 말에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 속물적인 인간이라 해도 시류에 편승되고 싶다.
빨간 금고.
친구가 집에 들이고 경제적인 부를 얻었다는 빨간 금고를 꼭 하나 갖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가격 대비 가장 눈에 띄는 빨간 금고 하나를 구매했다. 금고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몇 날 며칠이 기대로 설렜다. 친구들과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빨간 금고 하나면 해결될 것 같았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에 현관 앞에 놓인 상자를 봤다. 종이 박스에 쌓인 금고는 한아름에 안길 만에 사이즈였는데 예상외로 무게가 상당했다. 혼자서 들 수 없었지만 끌고 밀고를 반복하더라도 빨리 집안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렇게 몇 번에 시도를 해 봤지만 역시 무리였다. 퇴근하는 남편을 현관에서부터 반기며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양쪽에서 금고를 들고 옮겼다.
안방 침대 옆에 놓인 빨간 금고는 앙증맞았다. 스마트 터치 기능과 세련된 디자인은 만족감을 더 해줬다. 어린 시절 담뱃가게를 했던 외할아버지 댁에서 봤던 철제 금고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뻤다. 그런데 막상 집에 들인 금고에 들어갈 귀중품이 없었다. 아이들 돌반지 몇 개와 전세계약서 한 장 넣고 나니 그게 전부다. 뭔가 넣어보고 싶어서 고민하는데 어린 시절 읽었던 옛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물건 하나를 넣어 두면 두 개가 되어서 나오는 항아리. 금고에 넣어 둔 물건이 두 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종잣돈이라도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참이었다.
“여보 당신이 우리 집 보물인데 뭘 자꾸 채우려고 애를 써”
무심히 던진 남편의 한 마디는 가슴 한편에 쌓아둔 얼음 덩어리가 봄 햇살에 녹아내리듯 내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속물이 아닌 보물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너무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과 내가 진정으로 채우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추억이 담긴 옛 사진과 결혼 서약서 아이들 초음파 사진과 성장 앨범을 넣고 금고문을 닫았다. 그리고 빨간 금고 위에 화분 하나를 놓았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시류에 합류하지 못하면 좀 어떤가? 친구들과 만나는 다음 모임 때까지는 또 이런 삶에 만족하며 내 안에 담아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글로 써내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