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이혼한 시아버지는 자주 만나 뵙지는 못한다. 원래 남편과 시누이는 시아버지와 연락하지 않고 사셨는데, 본인들의 결혼을 기점으로 다시 연락하고 있다고 한다. 시누이는 여전히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이니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50대 후반부터 일을 하지 않으시는 아버님은 본인이 적적해지면서 그동안 연락도 안 하던 자식들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들인 우리 남편은 연락을 받아줬지만 딸인 시누이는 연락을 받아주지 않아서 시아버님이 딸이 아닌 사위와 그쪽 사돈 어른을 욕하는 카톡을 나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나도 신혼이었기 때문에 이거 무슨 막장 집안인가 싶어 시트콤같고 웃기기만 했는데, 살아보니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아버지를 만나면 시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니, 시누이에게 시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남편도 자기 아버지를 똑 닮아가는 모습이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솔직히 싫다.
시아버지는 동네 주민과 불륜을 저질러 이혼을 하셨다. 어머님과 이혼 2개월 만에 상대방과 혼인신고를 하셨고, 10년 정도 살다가 다시 이혼하셨다.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많이 주셨다고 하니 뭔가 속사정은 있겠지만 아무리 어른이고 남편의 아버지이지만 인간대 인간으로, 솔직히 한심하다.
뭐, 바람기도 유전이라느니 그런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는데, 시아버지가 바람을 펴서 이혼을 하신 것이 남편을 볼 때 가끔 떠오르는 게 우리 결혼 생활의 장애물 중의 한 가지다.
시아버지는 본인이 40대에 바람을 폈기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 시기에 그럴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본인의 주변 분들도 거의 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어선지, 자꾸만 우리 부부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신다.
나는 카톡 프로필을 기본으로 해놓을 때가 가끔 있는데, 그건 별 의미는 없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때마다 시아버지는 전화를 거셔서 "무슨 일 있냐?" 하신다.
나는 그 '무슨 일 있냐'는 말이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는 안부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그 말은 '너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구나? 나에게 다 말해보렴. 우리 아들이 딴 여자 만나서 싸웠냐?'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 이상을 바라보기 어렵고, 변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친척 중에는 바람으로 이혼하거나, 아니 이혼한 친척 자체가 없기도 하고 주변에서도 불륜 같은 일을 겪거나 저지른 사람이 없다. 그래선지 바람피우는 사람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시아버지는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는 없다.'는 세계관이 확고하신 듯하다. 그러니 본인 아들도 바람을 피울 것이고, 이혼을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나에게 늘 물어보신다.
그런데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뭐가 달라질까?
왜 나에게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실까, 단순히 '무슨 일 없지?' 가 아니라 '무슨 일 있냐'... 그러면 나는 기분이 몹시 무슨 일 있어진다...
이제는 전화가 오면 의례 "무슨 일 있냐?"로 시작하시는 시아버님의 말씀에 나는 "아니요."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내가 아니요,라는 세 글자만 내뱉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니, 00 이도 전화를 안 받고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전화했지." 하신다. 본인 아들이 전화를 안 받으면 왜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걸로 생각이 들까 싶다.
몇 년 전에는 참다 참다가 들이받은 적이 있었다.
"아버님 아무 일도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남편하고 사이좋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눈물도 같이 나오는 나로서는 울면서 그 말을 했는데도 시아버지는 "무슨 일 없으면 됐다. 나는 걱정이 돼서 그러지. 00이 간수 잘해라. 술도 못 마시게 하고. 저녁 먹고 들어온다는데 누구랑 먹는지도 네가 모르고 있으니까 걱정이 되지."라고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셨다.
본인의 바람기를 아들이 물려받았을까 봐 걱정이 되지만, 본인이 다른 여자를 만나서 이혼을 한 것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너네 시어머니 말 다 믿지 마라. 그쪽도 잘못이 있어."라며 첫인사자리에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셨던 시아버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도덕성이 결여되었을 확률이 높다는데 전전두엽이 발달하지 못하는 것도 유전이 될까. 자신의 전전두엽을 탓해야 할 텐데, 모든 것을 남탓하는 모습, 정말 시아버지의 모습이 딱 보이는 설명이다.
식당에 가면 항상 맛이 없고, 음식 타박을 하신다. "맛대가리도 없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주변 차와 사람들을 계속 욕한다. "저 새끼는 왜 저기서 유턴하고 지랄이래."
그러니 자기 합리화와 남 탓을 하는 사람이 도덕성이 떨어지고, 바람피울 확률도 높아지는 것 같다는 것이 학계 정설은 아니겠지만 나의 결론이다.
그러니까 나도 자기 합리화나 남 탓을 조금 줄이려고 노력해야겠다.
아들이 바람을 피더라도 그때는 그것 또한 내 탓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매번 "00이 간수 잘해라, 술 끊게 해라." 하시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누구를 간수할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 내 전전두엽이나 잘 간수해야겠다.
시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면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이 다 지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