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삶의 한 문턱을 지나는..
생존에 선 최초의 결단
현대인에게 통과의례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그 시기에 진입했음을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절차로서의 통과의례는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된다. 그 위치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여 자신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하지만 지금은 스무살이되면 저절로 성인이 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그 시기로 돌입한다. 그래서, 그것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의미가 될까. 오히려 그 보다는 취직이 더 큰 경계가 아닌가. 대학을 가서도 우리는 취직 걱정 뿐이니.
직장을 들어가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제 시작으로서의 통과의례는 끝인줄 알았다. 역시 돈을 벌면서 사회적 위치가 확보되어야 제대로 된 삶의 시작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의 착각이었나보다. 사실 취업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던, 사회적 강요에 의한 행위였던 모양이다. 진정한 결단은, 바로 그 취업한 직장에서 나오는 것, 스스로를 새로운 세상으로 던지는 것!
물론 직장도 구하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란 절벽에 내몰린 심정이었다. 하지만, 노동법의 보호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생존의 길에 다시 서리라는 결단에 비하면, 그것은 그래도 취준생이라는 따스한 온기의 응원과 그에 떠밀린 의지였던 것.
이 공간(브런치)에도 유독 퇴직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내가 그 길에 서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이야말로 삶에 대한 최초의 스스로의 결단이 아닐까. (물론 여러번이면 또 다를까...)
이 문턱에 서고 나서야 내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관계의 상황이 어떠한지, 삶에 대한 의지가 강렬한지 등을 절실히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절감한다. 모든 포지션은 사실 내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보아도 그의 과거는 현재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가로만 판단할 터이니, 단지 그 지위가 주었던 힘은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지 않던가. (물론 애초에 퇴직을 고민할때부터 흔들렸을 위치이기도 하다.)
생존에 선 최초의 결단.
지금 그 길에 섰다. 그러고나니 세상도 달리 보인다. 낮에 집 근처를 보면, 자녀와 환자를 위한 오프라인 공간이 대부분임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일하던 나는 온라인에서 주로 이것저것 하지만, 아이는 당연히 현장에서 잘 살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역의 상권은 당연히 그렇게 생겼다. 그러나 그걸 나만 몰랐던 거다. 그러고나서 이제야 고민하는 것이고. (여기가 새로운 시작이라면.. 큰일인게다.)
얼마나 현실의 삶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인가.
직장이라는 틀 안에 있으면서 실제의 삶과는 유리되었던 시간. 물론 난 또 그 틀로 갈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밖을 보게 되는 최초의 경험. 그렇게 나는 어렸던게다.
그래서 이것이 아마도 최초의 통과의례가 아닌가. 자신이 책임지는 생존을 건 최초의 결단과 행동.
두려워 뚫고 나오지 못했던 시간과 머물렀다면 여전할 나의 모습.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어차피 모른다. 의미는 그러한 시간에 한번이라도 단절을 주겠다는 나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