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 백성은 너였더구나.
2021.10.02. 뮤지컬 <경종수정실록>
배우: 에녹, 박정원, 정민
이 작품은 앞으로 몇 번 더 보게 될지 몰라 기록을 미루려 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내가 남긴 기록을 보고 좋은 작품을 더 빨리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작성한다.
경종과 연잉군을 소재로 한 작품은 대표적으로 2010년 방영된 드라마 <동이>와 2019년 방영된 드라마 <해치> 정도가 떠오른다. 두 작품 모두 당쟁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경종과 연잉군의 관계에 집중한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더욱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극장에서 사극을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조차 소극장에서 하는 사극 작품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소극장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고질적 병폐인 역사 왜곡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뮤지컬 <경종>은 꽤 고증이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종과 연잉군의 애증관계부터 홍수찬의 죽음까지 폭넓게 다루며 대사는 타이트해졌고, 큰 세트의 변화 없이도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기록을 보면 실제로도 경종은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실제 경종이 반역 모의를 이유로 노론을 숙청하는 과정에서도 연잉군을 끝까지 보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파가 달라 정치적으로 부딪히기도 했지만, 서로에 대한 우애를 놓지 않았던 형제였다.
뮤지컬에서 풀어낸 서사처럼 어쩌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윤(경종)이 동생인 이금(연잉군)을 위해 왕권을 물려주고자 했던 의지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해석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다. 극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각색과 드라마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 있지만, 이것이 불편하지 않고 이해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는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을 높이 평가한다.
극 중에서 경종 역을 맡은 에녹 배우는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이다. 연기와 노래 모두 뛰어나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하는 그의 인생 캐릭터는 단연 경종이라고 말하고 싶다. 에녹 배우의 연기를 보며 잘한다고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숨이 멎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탕평한 나라를 세우고 싶었던 이윤, 연잉군과 함께 걷고자 했던 이윤, 벗을 아끼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이윤, 하지만 숙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두려움에 떠는 이윤, 에녹 배우는 즉위 1년의 경종의 약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잘 연기했다.
홍수찬의 죽음 이후 경종의 흑화 장면은 가히 압도적이었으며, 최근 몇 년간 본 작품들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누군가는 과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경종이 칼을 휘두르며 흑화하는 장면에서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답답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쿵쿵쿵. 이렇게 세 번 숨이 멎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또 경종을 만나러 갔다.
연잉군 역의 박정원 배우는 실력파 배우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와는 한 번도 인연이 없었다. 많은 기대를 했던 배우여서 그런지 그가 첫 대사를 뱉었을 때 그의 특유의 쪼가 살짝 거슬렸다. 무대 위 배우보다는 매체에 어울리는 발성과 말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극 중반부로 가면서 모두 잊혀졌고, 내 기억 속에는 엄청난 성량과 열연의 아픈 연잉군만 남아 있었다.
경종과의 독대 장면에서 눈물을 참는 연잉군의 모습에서 왕을 독살하려는 세제가 아닌, 상황에 떠밀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처절한 아우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박정원 배우의 저력이며, 그가 표현하는 연잉군의 모습이었다. 다른 배우들이 표현한 연잉군도 무척 궁금하지만, 나는 아직 박정원 배우의 연잉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차기작 때문인지 박정원 배우의 회차가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아직 경종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박정원 배우가 표현하는 연잉군을 늦지 않게 꼭 만나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일등공신은 바로 홍수찬역의 배우가 아닐까 싶다. 내레이터, 노론, 숙종까지 다양한 롤을 담당하는 멀티맨으로서 엄청난 내공과 실력의 연기가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민 배우의 캐스팅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정민 배우의 연기력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에녹과 박정원 배우에 비해 노래는 조금 아쉽지만, 충분히 감상에 무리가 없는 수준의 보컬이며 무엇보다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정민 배우가 아닌 다른 배우가 표현하는 홍수찬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까지 뮤지컬 <홀연했던 사나이>에서 웃음을 주던 정민 배우의 변신은 정말 놀라웠으며, 소명을 위해 자신의 길을 가는 홍수찬이라는 인물의 고뇌를 잘 표현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돈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이 작품을 볼 것이다. 아직 에녹, 박정원, 정민 조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다른 캐스트들도 볼 생각이다.
올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계획에 없던 경종을 현장 예매로 본 것이고, 아쉬운 일 중 하나는 이 작품을 더 빨리 보지 못한 것이다.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정말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