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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귤 Mar 29. 2024

매일 그냥


큰 아이 유치원 상담이 있는 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어머니~ 써주신 상담지 보고 깜짝 놀랐어요. 글씨를 정말 잘 쓰시네요. 컴퓨터로 쓴 줄 알았어요. 어쩜 또박또박 쓰셨는지."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초등학생이 쓴 글씨 같은데 다소 과장된 칭찬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올해 목표 중 하나가 바른 글씨체를 가지는 것이다. 글을 쓰사람으로서 삐뚤빼뚤한 글씨체를 내보일 때마다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보기에 예쁜 글씨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씨 쓰기 연습이 1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바르게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오랫동안 굳어진 내 글씨체가 책 속에 나오는 정자체처럼 반듯하게 바뀔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신기한 것은 글씨 쓰기를 시작하고 두 사람에게 '글씨가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한글을 처음 익힐 때처럼 또박또박 따라 썼고, 글씨를 쓸 때마다 바르게 쓰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두 달간의 작은 습관이 변화로 나타났다는 것이 놀랍고 뿌듯하다.


꾸준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실감한다. 이때까지 해왔던 일들, 지켜왔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기분 좋은 변화를 만든다. 좋은 변화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지만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변화야말로 가장 신기하고 행복한 일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스로 초라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때 내게 위로가 되었던 말은 '위대한 사람은 큰 일을 이룬 이가 아니라 시간을 잘 보낸 사람이다. 날마다 차곡차곡 쌓은 시간이 그 사람이다.' 말이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결과와 성취로 내 삶을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 반복적인 육아와 집안일 속에서 내세울 결과나 성취는 소소하고 애매하며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그런데 날마다 쌓은 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니, 내 지난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말처럼 여겨졌다.


나는 잘하는 것이 많지 않다. 재능이 특출 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 다만 '지속적으로', '그냥' 하는 걸 잘하는 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일기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 글을 썼고, 책을 읽었다. 중학생 때부터 서른이 넘어서까지 매일 큐티를 하고 있다. 큐티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 성경 읽기, 묵상 등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매일 청소를 했으며 새 밥을 지었다.(물론 전업주부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평범하고 작은 일들을 꾸준히, 그냥 해왔다.  올해 새로 추가은 글씨 쓰기와 실내 자전거 타기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그냥' 하는 일 속에 들어왔으니 포기하지 않고 해보려 한다.



얼마 전 운전면허를 땄다. 초보인 나에게는 좌회전과 우회전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똑바로 달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전교육을 들을 때 강사님이 운전을 해보면 직선으로 달리는 게 제일 힘든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정말이었구나. 똑바로 가는 일이 어려운 것이구나. 글씨 쓰기도 똑바로 쓰는 것이 어려웠다. 줄을 맞춰 가지런히 쓰는 일이 힘들었다. 글의 양이 많아질수록 자꾸만 기울어지거나 삐뚤 해졌다. 도로에서도 직진이 길어질수록 핸들을 똑바로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바르게 사는 일은 어렵다.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길은 힘들다. 그러나 우린 간다. 직진을 해서 가고픈 곳으로 달려가고 글씨를 쓰듯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속적으로, 꾸준히, 날마다 하는 것의 힘은 바로 똑바로, 바르게 가도록 돕는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맞는 길인지, 꽃길인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쌓아가다 보니 보이는 것이다. 어떤 길은 좁은 길이지만 사는 길이고, 시작은 혼자였지만 동역자를 만나는 여정이었고, 외롭고 초라했지만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해왔던 일들이, 지켜왔던 것들이 바른 길로 데려다주었다. 내일도 나는 또, 그냥 하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꽃들이 팡팡 터진 거리처럼 나도, 우리도 저마다의 향기를 팡팡 터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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