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름 Jan 28. 2024

글쓰기로 배운 것

스누트 2023 │ 휴학

  필동로 가로수가 벚꽃을 품고 있던 3월, 대한극장 뒷골목을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작은 학교, <스누트 스쿨> 입학생의 첫 등굣길. 이충걸 교장선생님의 자랑 섞인 예고대로 교정은 탐스러운 벚꽃, 어스름한 저녁의 남산타워 뷰, 하굣길 <선미네 슈퍼마켓> 노상에서의 소맥과 스팸구이, 그리고 우리 은하(Milky Way Galaxy) 같은 학생들의 글과 이야기로 채워졌다.


  어느덧 9~10월 학기 두 번째 수업, 오늘의 주제는 ‘내 생에 가장 행복했던 가을’.

  여름 아닌 계절은 흘러가는 날짜일 뿐인 내게 가을이라고 특별할까? 하지만 교장선생님의 "이 세상 못 쓸 주제는 없다"는 말씀을 곱씹는다. 그래, 가을은 섬머로스증후군의 계절. 대신 여름이 사랑스러운 순간을 문장으로 수납했다. 나의 계절이 더 소중해졌다.


  스누트를 등록할 때 막연히 기대한 건 비문을 줄이고, 문장의 보푸라기를 털고, 매력적인 구성을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을수록 일상의 시(時)적인 순간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기록하는 일. 그래서 삶이 우리에게 준 것에 감사하는 일이 글쓰기라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오늘, 여름러버 사자자리 나도 다른 학생들이 꾹꾹 눌러 담은 ‘가장 행복했던 가을의 순간’을 읽고 나의 닮은 장면까지 발굴한다. 비 오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입술이 파래져도 30대 딸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던 60대 아버지. 연인과 충동적으로 떠난 가을 강릉 바다. 파도가 훑고 지나간 해변의 공기가 빠질 때의 울렁임. 맨발의 감촉. 상사의 오해 폭격에 다친 마음은 물론 다음 주 분량의 업무 스트레스까지 용문사에 스테이시 키고 온 이야기. (마침 힘들다고 연락온 회사 동기에게 “템플스테이 갈래?”라고 했다.) 1,200자로 담담히 기록한 아버지의 투병과 장례식까지의 2년.


  첨삭지 위로 맞은편 창 블라인드 그림자가 졌다. 스누트 수업이 한 시간쯤 지나고 있었다. 짧아진 해가 새삼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제도시의 미라클 모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